뉴스 > 연재소설
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54] 대나무 숲의 숨바꼭질
잘 보려면 멀리 있어야 한다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3-21 06:30:11
 
 
나는 배낭에서 에바의 노트를 꺼내 들고 불 앞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았다. 부드러운 벨벳 노트를 손에 쥐자 불안이 가라앉았다. 오래된 종이 냄새를 맡으며 손 글씨로 쓴 누군가의 일기를 읽는 것은 인쇄된 책을 읽는 것과는 다른 기분이었다. 최 박사가 준 약 때문인지 흐릿하던 시야도 한결 밝아져서 글을 읽는 데 어려움이 덜했다. 에바의 기록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시점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 나는 자로마을을 품고 있는 대나무 숲으로 올라가 곧잘 숨곤 했습니다.
 
또 산에 오른 게지.”
 
내가 보이지 않는다고 집안이 한바탕 뒤집히면 할아버지는 빙긋 웃음 띤 얼굴로 식구들을 안심시키고 집을 나섰습니다. 뒷짐을 지고 선량한 걸음으로, 할아버지는 산 너머로 기울기 시작하는 태양을 따라 대나무 숲길을 올랐습니다. 왜 미처 알아채지 못해서 대감마님을 또 놀라게 했을까, 하인들은 서로의 머리를 쥐어박았지만 손녀와의 숨바꼭질 놀이가 할아버지를 즐겁게 한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갑순이 어디 있는 게냐?”
 
험험하고 짐짓 염려스러운 듯 한차례 큰기침을 하면서 할아버지는 오솔길에 멈춰 섰습니다. 나는 할아버지가 잘 보이는 곳, 무성한 대나무 숲에 몸을 숨기고 가만히 기다렸습니다. 할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르면 나보다 먼저 대답하려는 듯, 찬 기운을 떨쳐 내지 못한 바람 한 줄기가 땅에서 작은 회오리처럼 솟구쳐 올랐습니다.
 
바람은 늘씬하게 뻗은 대나무를 타고 올라가 여린 이파리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졌습니다. 간지러운 듯 기분 좋은 전율이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저 나무에서 또 다른 나무로 잔잔한 물결처럼 숲 전체로 퍼져 나갔습니다. 살랑살랑 가지가 흔들리면 곧 첫 번째 알을 낳게 되어 몸이 무거운 황조롱이도 나른함을 떨치고 날개를 펼쳐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능선을 따라 4월의 철쭉들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해가 곧 질 터인데 할아비 혼자 내려가랴?”
 
그러면 나는 나무 덤불에서 폴짝 뛰어나갔습니다.
 
숨바꼭질이 그리 재미있느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숨어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럼?”
 
잘 보려고 멀리 있는 거예요.”
 
나는 입술을 쏙 내밀며 대답했습니다. 불순한 물질이 모두 채에 걸러진 듯 대숲을 투과해 들어온 오후의 늦은 햇살은 눈이 부셨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빽빽한 대나무들 사이로 할아버지를 끌어당겼습니다.
 
쉬잇.”
 
나는 검지를 입술 앞에 세우고 할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할아버지도 키를 낮추고 나와 함께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대나무 숲도 함께 숨바꼭질하려는지 수런거림을 멈추었습니다. 흰 도화지 속으로 숲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처럼 사방이 고요했습니다. 나는 눈동자만 움직였습니다. 숨어서 관찰하는 눈과 귀, 코와 피부는 예민하게 감각의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21
좋아요
20
감동이에요
2
화나요
0
슬퍼요
1
오늘자 스카이데일리
주요 섹션 기사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새문안로 26 청양빌딩 7층 | 전화 : 02-522-6595~6 | 팩스 : 02-522-6597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시 아01703, 등록일 : 2011년 7월 18일, 발행·편집인: 조정진, 편집국장: 고동석
copyrightⓒ2011, All rights reserved. Contact : skyedaily@skyedaily.com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선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