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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국내 최초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이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임시수도 기념관' 입구에 세워졌으나 붉은 페인트 테러를 당한 바 있다. 2024년 봄 대한민국에선 ‘총성 없는 전쟁’이 진행 중이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주변에서 몇 편의 국산 극영화와 다큐영화가 각축을 벌이고 있다. 4월10일 총선에 영향을 줄 것이다. 아예 나름의 정치적 목표를 노리고 개봉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흔히 우리 사회의 현 이념 지형을 3:4:3으로 본다. 가운데 ‘4’가 이른바 ‘중도’ 내지 ‘부동층’으로 불리는 표심이다. 특정 진영에 확고한 소속감을 보이지 않지만 선거에선 결정적 역할을 한다.
지난 30년 우리나라 문화계는 87체제의 이념 구도를 뚜렷이 반영해 왔다. 김대중정부 이후 20여 년 영화계는 급속히 반(反)대한민국 쪽으로 기울었다. 어느 나라나 산업화시대란 시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이기에 어두운 측면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한 메시지가 각종 대중서사에 담기는 것 자체야 매우 가치있고 유의미한 현상이지만 선을 넘었거나 그것을 유도하는 경우도 많다. 표현의 자유를 내세운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반체제 성향으로 기울어질 수 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엔 해석의 방향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심도있는 토론과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 적지 않음에도 역사적 인물이나 이슈가 대중서사에서 일방적·자의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자유민주공화국이라는 국가정체성에 기반해 충분한 연구와 논의를 거쳐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국가보안법은 사실상 사문화에 가까운 상태다. 대한민국에 적대적인 활동을 민주화 운동으로 평가하는 등 2020년 총선 때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 자주 언급됐다. 영화나 유튜브 강의 등으로 접하는 역사 교육을 통해 대한민국을 ‘친일적폐가 지배하는 나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보는 시각이 강화됐고 노골화됐다.
특정 정당의 지지자가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역사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관점이 우세해져 있다. 우여곡절이 많은 대한민국 역사 및 기득권의 성장사를 통째로 폄하해 버리거나 헌법에서 자유를 삭제하려는 관점을 무심히 받아들이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 역사 전쟁은 문화전쟁의 본질이자 정치이며 시민의 삶을 좌우하는 문제다.
이승만 죽이기의 결정판 ‘백년전쟁’
‘백년전쟁’(이승만 편)은 건국 이후 수면 아래 잠복해 있던 역사 전쟁을 본격 촉발했다. 2012년 유튜브에 유포된 이 동영상은 이승만을 ‘친일’ ‘바람둥이’ ‘공금 횡령자’ ‘하와이 깡패’로 그렸다. 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악마화·희화화의 결정판이다. 더구나 건국의 아버지인 그를 그렇게 규정해 버리는 건 국가의 근간을 뒤흔들 사태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해선 이승만 죽이기보다 효과적인 게 없다. 건국 자체가 이승만 개인기에 힘입은 바 크기 때문이다. ‘건국전쟁’을 건국 세대에 헌정한 김덕영 감독이 제작 과정에서 휩싸이게 된 감정을 ‘죄송함’으로 요약한 것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김 감독은 언론 인터뷰 중 울컥하기까지 했다. 철저히 잘못 알고 혐오해 온 존재의 진실을 대면했을 때의 격정이 자연스레 표출된 것이다. 그의 그런 격정은 ‘오늘의 대한민국’ ‘지금의 나’를 가능하게 한 근본적 출발점을 제대로 알게 되면서 비롯된 자책감과도 같은 것이리라. 김 감독이 ‘건국전쟁’을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 “시민적 성숙을 이끌 영화”로 자평한 이유다.
‘건국전쟁’을 향한 뜨거운 반응의 단초는 다큐 ‘백년전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해 2012년 1~3월 RTV가 ‘두 얼굴의 이승만’ ‘프레이저 보고서’ 두 편을 각각 29회·26회 방송했다. 한국 근·현대사 100년을 독립운동가 대(對) 친일파 및 그 후손들의 전쟁으로 보고 두 전 대통령을 다뤘다. 재미와 지식을 내세운 듯한 영상의 만듦새는 제작진의 문화 역량을 보여 준다.
“대한민국에 대한 선전포고”
‘백년전쟁’ 이승만 편은 2012년 이래 유튜브 조회수만 265만을 기록했다. 다른 채널을 통한 것까지 따지면 얼마나 될지 정확히 가늠하기 어렵다. 범민주당 진영에서 대대적으로 홍보·전파했으며 주로 전교조 소속 교사들을 통해 중·고생들에게도 적극 권유됐다. 이 현상을 역사학자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대한민국에 대한 선전포고”로 표현했다.
표현의 자유? 사자 명예훼손?… ‘文 정부, 김명수 대법원’에서 뒤집힌 판결
2013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 등 유족과 사회시민단체 관계자들이 ‘백년전쟁’ 제작자·배포자를 사자(死者)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 방통위는 그해 8월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공정성·객관성 유지 의무 및 명예훼손 금지)을 위반했다며 관계자에 대해 징계·경고를 내리고 이 사실을 방송으로 알리도록 명령했다.
2015년 7월 1·2심 재판부는 방통위 제재가 적법했다고 판결했다. 박근혜 대통령 임기 중이었다. 당시 재판부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 평가 없이 부정적인 사례와 평가만으로 작품을 구성하고 제작 의도와 달리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은 의도적으로 배제해 사실을 왜곡했다”고 판단했다.
문재인정부 들어 상황은 정반대가 된다. 전임 정부 시절의 방통위 제재와 이를 ‘적법’으로 판단한 1·2심 판결을 2018년 8월 대법원이 뒤집은 것이다. 당시 시민방송 ‘RTV’가 ‘백년전쟁’에 대한 방통위 제재 처분을 취소해 달라며 낸 소송의 상고심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했다.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김선수·김상환·김재형·노정희·민유숙·박정화) 7인은 “‘백년전쟁’이 공정성·객관성·균형성 유지 의무 및 사자 명예존중 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대법관 12명 의견이 6대 6으로 갈린 상황에서 결정타는 문 대통령이 임명한 김 대법원장의 선택이었다.
‘백년전쟁’이 유료의 비지상파 채널로 방송됐고 시청자가 제작한 다큐멘터리라는 점에서 방송사업자가 직접 제작한 프로그램보다 완화된 심사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백년전쟁’이 주류의 역사적 사실과 해석에 의문을 제기해 다양한 여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 것으로 공정성을 해칠 만큼 편향되진 않았다고 본 것이다.
당시 대법원은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에 대한 후대 평가는 각자의 가치관이나 역사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역사적 논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며 “방송 전체의 내용과 취지를 볼 때 중요한 부분이 외국 정부의 공식 문서가 신문기사 등 객관적 사실과 합치되므로 명예훼손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김재형 대법관은 다수의견의 보충 의견으로 “표현 행위에 대한 행정 제재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으니 자율심의체계로 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선수·김상환 대법관은 ‘국민의 역사 해석·표현에 대한 국가권력 개입의 한계와 정도’를 언급하며 “법원의 신중한 자세가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대법관 6명(권순일·박상옥·안철상·이동원·이기택·조희대)의 반대 의견도 있었다. “방송 자체가 사실에 부합하지 않아 객관성을 상실했고 제작 의도와 상반된 의견은 소개하지 않아 공정성·균형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승만 죽이기는 북한의 대남공작의 일환”
‘백년전쟁’ 공방에서 ‘주류의 역사적 사실과 해석’에 반하는 관점의 의미가 주장되기도 했다. 60여 년간 철저히 왜곡되고 금기시된 인물에 무슨 ‘주류의 역사적 사실과 해석’이 있었다는 말일까.
이승만 전기 소설 ‘물로 씌어진 이름’(총 5권)의 저자 복거일 작가와 연세대를 정년퇴임한 사회학자 류석춘 교수는 이승만 연구를 하다 문단과 학계에서 따돌림당한 고충을 수차례 토로한 바 있다.
민경우 시민단체 길 대표(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는 다년간 사실상 친북 활동을 하다가 전향한 인물이다. 자칭 간첩 출신이기에 그의 ‘건국전쟁’ 관람 소감은 한층 무게를 더한다. 무엇보다 4·19 일주일 만에 사태를 파악하고 병원을 찾은 이승만이 학생들을 위문하며 울먹이는 장면을 악마화된 ‘이승만=독재자론’을 뒤엎을 최고의 장면으로 꼽았다.
민 대표가 최근 자신의 유튜브 채널 ‘경우있는 밤’을 비롯해 다수의 방송 및 인터뷰에서 밝힌 바, 대한민국을 부정하려면 이승만을 부정해야만 했다. 그것이야말로 지난 수십년 지속돼 온 이승만 죽이기의 핵심적 진실이다.
민 대표는 지난달 14일 펜앤마이크TV에 출연해 ‘건국전쟁’이 불러일으킨 변화를 40여 년 전 ‘해방전후사의 인식’으로 구축된 586세대의 북한 중심 역사관을 전복시킨 사건, 즉 ‘시대적 패러다임의 전환’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한반도 역사 한복판의 이승만
한반도 현대사는 결국 ‘이승만의 나라’냐 ‘김일성의 나라’냐의 양자택일로 압축된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보는 열쇠다. 이승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대한민국을 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 근·현대사 재인식의 한복판에 이처럼 이승만이 자리하고 있다.
이승만의 90평생은 한국사를 넘어 세계사 차원에서 조명할 만하다. 동북아시아 문명의 정수인 한학(漢學)에 정통하면서 서구 근대문명의 정수를 꿰뚫은 존재는 예나 지금이나 전 세계 통틀어 몇 안된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모친을 통해 불교에 대한 이해도 상당했다. 러시아혁명이 성공한 지 얼마 안 되는 1923년 시점에서 공산주의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으며 공산당을 단호히 배격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앞으로 더 많은 학술연구와 다양한 서사 장르(소설·영화·다큐·드라마 등)가 이승만을 다뤄야 할 것이다. ‘건국전쟁’은 극도로 왜곡되거나 날조된 통념 몇 가지를 우선적으로 바로잡았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이토록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만큼 우리 사회는 거짓 정보와 무지로 뒤덮여 있었다.
역사 전쟁 최전선… 재야학자들의 활약
‘백년전쟁’의 악의적 재구성이나 ‘건국전쟁’을 향한 폄훼에 맞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는 재야의 고수들을 유튜브 ‘그라운드C’와 ‘박종인의 땅의 역사’에서 만날 수 있다. ‘그라운드C’에 따르면 이승만을 바람둥이·사기꾼으로 몰아가는 데 쓰인 사건은 무혐의로 끝난 해프닝이었다.
‘백년전쟁’에선 해당 사건의 결론이 담긴 서류의 뒷 장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라운드C’는 이승만의 횡령 의혹 역시 무고임을 미 공문서와 국내·외 연구서 등을 인용해 조목조목 밝히고 있다.
재야 연구자들의 활약이 더욱 왕성해질 전망이다. ‘건국전쟁’을 계기로 김구에 대한 인식또한 새로워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간 김구는 이승만을 이해하지 못한 민족주의 만능 시대에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 내세워진 인물이자 존경하는 위인으로 김일성을 꼽고 싶을 때 차용돼 온 지도자였다.
김구에 관한 김용삼 대기자나 정안기 박사 등의 연구 성과가 이미 쌓여 있다. 이승만학당이나 펜앤마이크TV 출연과 각종 강연을 통해 공개됐으나 학계와 교육 현장에 반영되지 못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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