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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국지 [275] 유신과 춘추 ②
소첩을 가끔 찾아만 주신다면 더는 바랄 게 없겠나이다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2-23 06:30:20
 
 
천관의 살결은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이 희고 매끄러웠다. 유신은 가만히 그녀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오르내리는 느낌이 그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유신은 천관의 옆에 누웠다.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맞춰 숨을 쉬었다. 그러자 동요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잠시 후 천관이 잠에서 깼다. 그녀는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연스럽게 유신의 품에 안겼다. 그 순간, 그의 가슴속에서 꺼져 가던 불씨가 다시 타올랐다. 가벼운 애무는 점차 격렬한 행위로 변해 갔다. 절정에 오르는 순간 그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천관 역시 지쳤는지 그대로 쓰러져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유신이 돌아간 후 천관은 자리에 누워 자신의 가슴에 유신의 손이 닿았을 때 느꼈던 감흥을 되새겼다. 그 순간에는 둘 사이의 모든 벽이 사라지고 오로지 음양으로 교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평생 그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겠노라 다짐했다.
천관은 수양어미가 부르는 소리에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수양어미는 손님 맞을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천관은 콧노래를 부르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화창한 날씨는 그녀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유신과의 소중한 하룻밤을 되새겼다. 그와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찬란한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집으로 돌아온 유신은 천관과 함께했던 밤을 잊을 수 없었다. 낮에 낭도들과 어울려 사냥을 나갔을 때도, 밤에 혼자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펼쳤을 때도 머릿속은 온통 그녀로 가득했다. 시시때때로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 어미에게서 떨어진 어린아이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천관의 집으로 달려갔다.
천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유신을 맞아들였다. 맑은 정신으로 보는 그녀의 모습은 화려했던 지난밤과는 달리 수수하고 청순했다. 그녀는 그를 안채에 있는 자신의 처소로 이끌었다. 이곳은 어떤 사내도 들어와 본 적이 없는 금남의 구역이었다. 방 안은 예상과 달리 소박하고 단정하게 꾸며져 있었다. 꽃과 나비 무늬가 새겨진 반닫이 옷장과 잘 닦인 경대를 비롯해 꼭 필요한 가재도구 몇 가지만 눈에 띄었다.
 
유신은 천관이 시키는 대로 보료가 깔린 상석에 앉았다.
그녀는 예를 갖추어 큰절을 올렸다.
지난번에 귀하신 분께 결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너그러이 용서하소서.”
유신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귀인께서 소첩을 미천한 계집이라 내치지 않고, 가끔 찾아만 주신다면 더는 바랄 게 없겠나이다.”
천관의 진심 어린 말을 듣고 유신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나 또한 그대 생각에 며칠 동안 마음을 잡을 수 없었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천관을 안자 유신의 가슴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비로소 그에게도 사랑의 열병이 찾아온 것이었다.
 
천관은 수양어미의 만류에도 도성 안에 따로 거처를 마련하여 연인이 찾아오길 기다렸다. 유신이 매일같이 그녀의 집에 들르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져 갔다. 어쩌다가 못 만나는 날에는 서로 허전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둘의 만남이 빈번해지다 보니 자연히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신이 천관과 심상치 않은 관계라는 소문이 도성 안에 파다하게 퍼졌다.
천관을 사모하여 하루가 멀다고 드나들던 사내들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유신에 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그는 졸지에 어린 나이에 주색에 빠져 허우적대는 망나니가 됐다.
 
이 소문은 결국 유신의 어머니, 만명 부인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만명은 아들이 좋지 않은 구설에 휘말린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서현과 함께하기 위해 겪어야 했던 고통이 너무 컸기에 제 아들만은 힘든 사랑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게다가 유신이 한갓 기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 소문이 태후전에 전해지면 겨우 되찾은 태후의 신임을 잃을 수도 있었다.
유신이 오랜만에 집에 일찍 들어오자 만명은 시녀를 시켜 조용히 불렀다. 유신은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부름에 떨떠름했지만 애써 태연한 얼굴로 안채로 들었다.
만명은 굳은 얼굴로 아들을 맞이했다. 항상 미소로 반겨 주던 어머니의 표정이 어두운 걸 보고 유신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리라 직감했다.
만명이 힘겹게 얘기를 꺼냈다.
내 들으니 네가 요즘 엉뚱한 곳에 정신을 빼앗겼다 하더구나.”
 
유신은 그제야 모친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천관과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그는 어머니가 남다른 심지를 품은 분이라 생각했기에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고백했다.
만명은 무르익은 사과처럼 붉게 변한 아들의 얼굴을 보고 예상보다 상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저런 지경이라면 주변 사람이 아무리 말려도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터였다. 젊은 시절, 자신도 그런 열병을 지독하게 앓아 봤기에 만명은 아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잠시 과거를 떠올렸던 만명은 냉정함을 되찾았다. 귀족의 자제와 기녀의 사랑은 신라 상류사회에서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아들의 앞길을 망칠 것이 분명했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여러 면에서 뛰어난 자질을 갖추었던 유신은 한 번도 부모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철이 들면서는 자신의 앞가림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히 해냈기에 주위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이런 아들에 대한 서현과 만명의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었다. 비단 부모뿐이 아니었다. 외할머니인 만호 태후와 외삼촌인 진평왕 역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유신에게 많은 애정을 기울였다. 이처럼 유신은 가야계라는 제약을 극복하고 가문을 일으킬 재목이었다. 그런 인물이 천한 기녀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집안의 큰 우환거리가 될 것이었다.
 
안 된다! 그 계집은 너의 앞길에 방해가 될 뿐이다!”
만명의 말은 바늘 하나 들어갈 여지없이 단호했다.
유신이 품었던 기대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렇다고 이대로 호락호락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어찌 안 된다 하십니까?”
만명은 엄하게 아들을 꾸짖었다.
너는 단지 네 한 몸이 아니다. 이 집안과 나라가 너의 어깨에 걸머져 있다. 네가 계속 미망(迷妄)에 빠져 허우적거린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살리고, 백제와 고구려를 제압하여 삼국일통(三國一統)을 이루겠다는 너의 웅대한 꿈은 어디로 갔느냐? 네 경솔한 행동이 모든 사람의 바람을 물거품으로 돌린다는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이냐!”
모친의 간곡한 호소가 유신의 가슴을 울렸다. 과연 지금까지 키워 왔던 꿈을 천관과 바꿀 수 있을까? 이는 자신의 영달뿐 아니라 주변 사람의 기대와 백성의 염원을 저버려야 하는 일이었다. 유신은 천관에게 빠져 이 모든 것을 잊고 있다가,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들이 반성하는 기미가 보이자 만명은 마지막 일침을 놓았다.
네가 기녀를 택한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겠다. 아들이 파멸의 길로 가는데 멀뚱히 바라보기만 한 어미가 구차하게 살아서 뭐 하겠느냐!”
만명은 품 안에서 은장도를 꺼내 들었다. 이를 보고 놀란 유신은 황급히 모친의 손에 들린 칼을 빼앗으며 울부짖었다.
어머니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제발 고정하십시오.”
유신은 모친의 강수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그 자리에 쓰러져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다.
만명은 울고 있는 아들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졌다.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심정이 오죽할까마는 대업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이후로 유신은 천관의 집을 일절 찾지 않았다. 작별 인사라도 해야 했지만 그녀를 보면 결심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아 차마 찾아갈 수 없었다.
유신은 쓰라린 가슴을 달래기 위해 낭도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날이 잦아졌다.
그러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유신은 낭도들과 함께 더위를 피해 남천(南川)으로 천렵을 나갔다. 웃고 떠드는 사내들 사이에서 취하도록 술을 마신 그는 홀로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취기가 오르면서 슬슬 잠이 쏟아졌다. 그는 말 등에 앉은 자세로 잠에 빠져 버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유신은 말 울음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낭도들을 뒤로하고 떠날 때는 해가 남아 있었는데, 어느새 주변에 어둠이 깔려 있었다.
유신은 집에 다 온 줄 알고 말에서 내렸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상태였다. 몸이 너무 피곤해서 침소로 들어가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대문으로 들어서려는데 이상했다. 분명 익숙한 대문이기는 했지만, 그의 집 문은 아니었다. 유신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제야 자신이 천관의 집 앞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유신은 마음이 복잡했다. 몇 걸음만 옮기면 그토록 갈망하던 천관을 볼 수 있었다. 비록 그녀를 포기하겠다고 굳게 다짐했지만, 수시로 몰아치는 그리움은 마음을 황폐하게 했다. 잠시라도 그녀를 만난다면 바짝 말랐던 마음이 단비를 맞은 듯 촉촉해질 것이었다.
하지만 유신은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천관은 그에게 단비로 그칠 존재가 아니었다. 결국엔 폭우로 변해 그의 앞날을 쓸어 버릴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 유신을 화나게 했다. 그는 분노를 분출할 곳이 필요했다. 그러지 않고는 미칠 것만 같았다.
이때, 타고 온 말이 유신의 눈에 들어왔다. 말은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며 칭찬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은 말에게 다가갔다. 말은 주인이 쓰다듬어줄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은지 가벼운 콧소리를 냈다.
유신은 말안장에 걸어 뒀던 칼을 뽑아 들었다. 그제야 말도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땅바닥을 차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칼날이 달빛을 빨아들인 듯 하얗게 빛났다. 유신은 자책감과 분노, 그리고 표류하는 연모의 정을 한꺼번에 토해 내는 듯한 기합 소리와 함께 말의 목을 내리쳤다. 섬광이 번쩍이더니 단말마와 함께 말의 커다란 몸이 무너져 내렸다.
유신은 목이 잘린 채 널브러진 말의 주검을 보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로써 천관에 대한 마음도 깨끗이 잘라 냈다.”
유신은 칼을 집어 던지고 어둠 속으로 훠이훠이 걸어 들어갔다.
말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을 때, 조용히 대문이 열리더니 천관이 힘없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유신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이제는 눈물을 흘릴 기력조차 남지 않았는지, 백설같이 하얀 얼굴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무표정했다.
천관은 말의 주검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겼다. 그녀는 사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피가 엉긴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슬픈 사랑의 노래를 불렀다. 노랫소리는 유신에게 이르지 못하고 어둠에 갇혀 제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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