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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국지 [274] 유신과 춘추 ①
그리운 사람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게로구나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2-22 06:30:20
 
 
신라 진평왕 시절, 금성에는 천관(天官)이라는 기녀가 있었다. 그녀는 빼어난 미모와 일가를 이룬 가무 솜씨로 뭇 사내의 애간장을 녹였다. 그런 가운데도 본분을 지켜 웃음과 가무를 팔 뿐, 누구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봄이 무르익은 어느 날 밤, 천관은 가슴이 답답해서 후원으로 난 창문을 열었다. 산들바람에 실려 오는 밤꽃 향기가 그녀의 마음을 울렁이게 했다.
달빛 아래 자태를 드러낸 목련 나무를 보니 아름답게 빛나던 흰 꽃이 온데간데없었다. 메마른 가지만이 신산하게 드러난 것이 자신의 앞날처럼 느껴져 가슴이 저렸다. 지금은 사내들이 자신의 아름다움에 취해 간이고 쓸개고 꺼내 줄 것처럼 달려들지만 세월이 흘러 미모가 시들게 되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었다.
천관은 너무 일찍 사내의 생리를 알아 버렸다. 그건 어쩌면 세상의 이치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문단속하듯 마음에 자물쇠를 굳게 걸었다.
하지만 봄날의 밤은 천관이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따스하면서 끈적한 공기가 그녀를 감싼 채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천관의 마음이 달떠 있을 때 하녀가 문밖에서 큰 소리로 아뢰었다.
화랑의 낭두(郞頭)들이 오셨는데 아씨만 찾습니다.”
낭두라는 자들은 젊은 혈기에 세상모르고 설치는 풋내기들이었다. 맛을 알지도 못하면서 술을 들이켜고, 음악은 듣지도 않고 왁자지껄 떠들기만 하는 무리였다.
천관은 그런 자들 때문에 오랜만에 느끼는 봄밤의 정취를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천관은 하녀에게 일렀다.
오늘은 내가 몸이 안 좋아서 나갈 수가 없구나. 죄송하다고 말씀드려라.”
하녀가 물러가고 얼마 후, 문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수양어미가 잔뜩 심사가 뒤틀린 얼굴로 나타났다.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고운 얼굴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예전에는 한가락 했던 퇴기였다.
아무래도 네가 나가 봐야겠다. 낭두들이 너를 꼭 한번 보고 가야겠다고 성화구나. 몸이 안 좋다고 해도 막무가내이니 어쩌겠느냐. 나가서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여 줘라.”
천관은 짜증이 났지만 수양어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은 법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천관은 본시 도성 밖 마을에 사는 농부의 딸이었다. 그 아비가 어려운 살림에 입 하나 덜고자 그녀를 기방에 팔았다. 기방의 행수는 예쁘고 영특한 천관이 마음에 들어 수양딸로 삼고, 기녀가 되는 데 필요한 모든 걸 가르쳤다.
천관은 커 갈수록 태가 나더니 열네 살 즈음에 함박꽃처럼 피어났다. 이때부터 천관은 화류계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수양어미 또한 그녀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잠시 후에 나가겠습니다.”
천관은 할 수 없이 정성껏 치장하고, 낭두들이 기다리는 방으로 건너갔다.
방 앞에 이르니 청년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천관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나타나자 시끄럽던 방 안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말로만 듣던 천관의 눈부신 미모에 모두 말을 잃은 것이었다.
천관이 우아하게 절을 올리자 체격이 장대한 낭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손목을 잡아끌었다.
천관은 그의 손을 부드럽게 뿌리치며 양해를 구했다.
소녀가 오늘 몸이 좋지 않아 귀하신 분들께 폐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다음에 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안을 당했다고 여긴 낭두는 크게 화를 냈다.
천한 기녀 주제에 어찌 이리 무례하단 말인가. 여기 계신 분이 누군 줄 아느냐? 바로 화랑도의 풍월주인 유신 공이시다!”
천관이 상석에 앉은 사내를 보니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미소년이었다. 어린 나이에 풍월주라니 예사 인물은 아닌 듯했다.
천관은 거칠기 짝이 없는 낭두들 사이에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기녀는 이들을 달래는 척하면서 놀렸다.
어찌 하찮은 소녀가 여러분처럼 고귀하신 분들을 능멸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소녀가 괴이한 병을 앓고 있어, 소중한 옥체에 옮기지나 않을까 두려운 것뿐입니다.”
그녀를 끌고 가려던 낭두는 엉겁결에 뒷걸음질 쳤다. 곰 같은 체격의 사내가 놀라는 모습이 어찌나 방정맞은지 주변 사람들은 웃음을 찾지 못했다. 방 안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안 낭두는 얼굴이 발개져서 천관을 노려봤다. 안색이 너무 붉어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보였다.
유신이 좌중의 웃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점잖게 입을 열었다.
염장(廉長), 그만하게나. 낭자가 몸이 불편하다는데 강요할 수는 없지. 원하던 대로 얼굴은 봤으니 이만 가세나.”
그토록 서슬이 푸르던 사내가 그의 한마디에 바로 고개를 떨구며 물러났다.
천관은 풍월주에게 눈길을 돌렸다. 굵은 눈썹 사이의 미간을 살짝 찡그리는 모습에서 나이답지 않은 연륜이 느껴졌다. 광채 나는 눈동자는 사람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했다.
천관은 얼굴이 붉어지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온몸에서 전율이 이는 듯했다.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몸의 야릇한 반응이 그녀를 당황스럽게 했다.
이런 모습을 본 유신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소? 안색이 안 좋구려. 우리가 정말 폐를 끼쳤나 보오. 이만 가 보겠소.”
천관은 유신을 붙잡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풍월주 일행이 나간 후에 그 자리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손님을 배웅하고 돌아온 수양어미는 천관이 넋 놓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뛰어들어 왔다.
무슨 봉변이라도 당한 게냐?”
천관은 말없이 유신이 앉았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그날 이후 천관은 유신의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며칠을 몸져누워 있다가 기운을 차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넋을 놓고 유신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염장이 의형인 보종(寶宗)과 함께 천관의 집을 찾았다.
염장은 의형에게 큰소리를 쳤다.
지난날은 아프단 핑계를 댔지만 이번에도 그러지는 못 할 겁니다.”
자네도 참 어지간하네.”
형님은 그냥 저 하자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이번에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온 것이었다.
낭두들이 왔다는 말을 들은 천관은 유신이 아닐까 기대하며 서둘러 객방으로 나갔다. 그러나 방 안에는 반갑지 않은 두 사내만이 있었다. 천관은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천관을 본 염장은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오늘은 우리와 함께할 수 있겠느냐?”
천관은 흥을 잃었지만 또다시 손님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서 두 사내의 잔에 술을 따랐다.
네가 가무에 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어디 한번 보자꾸나.”
천관은 염장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일어나 춤을 췄다. 그녀의 춤사위는 짝 잃은 기러기의 날갯짓만큼이나 서글프게 보였다. 슬픈 춤에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연모가(戀慕歌)가 실리자 감성이 무딘 염장마저 눈시울을 붉혔다.
가무가 끝나고 천관이 자리로 돌아왔다.
보종은 그녀를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리운 사람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게로구나.”
이리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그녀에게는 위로가 됐다.
내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속 시원히 털어놔 봐라. 그러면 마음이라도 편해질 테니.”
보종은 성품이 온화하고 정이 많았다. 주변 사람이 병들어 고통스러워하면 같이 아파했고, 불쌍한 사람을 만나면 돕지 않고는 못 배겼다.
관옥 같은 얼굴에 어울리는 그의 목소리엔 사람을 안심시키는 힘이 있었다. 마치 선계의 사람 같았기에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진선공자(眞善公子)라 불렀다.
마음이 풀어진 천관은 풍월주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털어놨다.
뜻밖의 얘기를 들은 보종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풍월주께서는 복도 많으시구나.”
천관을 탐내던 염장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되면 그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연을 들은 보종은 두 사람을 맺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며칠 후, 보종은 낭도들의 일로 의논할 게 있다며 풍월주를 천관의 집으로 이끌었다. 그가 미리 연통해 두었기에 천관은 곱게 단장하고 유신을 기다렸다. 평소보다 정성 들여 화장을 했고, 여염집의 품위에 맞는 옷으로 골라 입었다. 해가 저물어 갈수록 그녀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흥분과 기대로 몸이 바르르 떨릴 정도였다.
유신이 보종·염장과 함께 천관의 집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서녘 하늘이 붉게 물들면서 그의 얼굴도 발그레해졌다.
하인의 안내를 받은 세 사람은 별채로 들어섰다. 이곳은 본채의 후원 쪽에 자리 잡았는데, 사람의 왕래가 없어 조용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보종은 풍월주를 돌아보며 변명하듯 말했다.
사람들이 오가면 시끄러울까 봐 미리 조용한 방을 부탁해 두었습니다.”
그들이 별채에 자리를 잡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녀들이 주안상을 내왔다.
보종은 먼저 풍월주의 잔에 술을 따랐다. 유신은 호기롭게 단숨에 잔을 비웠다. 보종과 염장도 따라서 술을 들이켰다. 이렇게 몇 순배가 돌자 술에 익숙지 않은 유신과 보종은 금세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유신이 취기가 오른 것을 확인한 보종은 염장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면서 측간에 가겠노라며 일어났다. 염장도 몸을 가누지 못하는 보종을 부축한다며 자리를 떴다. 홀로 남겨진 유신은 옷을 느슨하게 풀어 헤치고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술기운이 오르니 마치 배가 풍랑을 만난 듯 사방이 출렁였다.
이때 문이 열리더니 아름답게 채색된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들어왔다. 천관이었다. 유신은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방 안에 바람이 불 리 없는데 천관의 옷자락이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속삭이듯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단풍 빛으로 물든 그녀의 입술이 유신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유신이 홀린 듯 천관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는 어느새 뱀처럼 허물을 벗고 알몸이 되어 있었다. 뜨거운 팔이 그의 목을 감아 왔다. 국화 향기처럼 달콤한 체취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유신의 몸이 활활 타올라 불덩이로 변했다. 그는 끓어오르는 욕망에 몸을 맡겼다.
 
유신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동이 튼 후였다. 숙취 탓에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머릿속에서 돌이 굴러다니는 듯했다. 이때 바로 옆에서 기척이 났다. 유신이 돌아보니 여인의 고혹적인 자태가 눈에 들어왔다. 잠결에 몸을 뒤트는 바람에 흘러내린 이불 위로 굴곡진 나신(裸身)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난밤에 경험했던 환상적인 열락(悅樂)은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신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여인의 벗은 몸을 눈부신 듯 바라봤다. 비록 부모님의 뜻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는 일찍 혼인을 했다. 그의 아내는 명문 귀족 집안에서 자란 교양 있는 여인이었기에 남편 앞이라 해도 항상 격식과 예의를 지켰다. 그러므로 이처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의 나신을 보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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