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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33] 죽음을 각오해야 얻는 삶
내가 살아남는 것이 당신에게도 중요합니까?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2-20 06:30:10
 
 
트러스트 미는 후원으로 운영되는 단체가 아닙니다. 강무훤 씨가 완치된다면, 증상에 대한 병명이 확정되고 치료 약이 개발됩니다. 인류를 지켜온 각종 백신과 수많은 치료제가 그렇게 개발, 판매되고 있습니다. 의학만이 아닙니다. 과학의 발달과 기술의 혁신 또한 트러스트 미 재단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강무훤 씨가 사용하는 일상용품에서부터 우주 첨단 과학 기술까지, 트러스트 미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면 맞을 거예요.”
 
정하운이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사람을 얻는 겁니다.”
 
정하운의 말은 나를 두렵게 했다. 집이나 장기라도 내놓으라면 모를까. 저들이 나 같은 사람을 얻어 무슨 이익이 있단 말인가? 나는 한 단계 건너뛰기로 했다.
 
나와 같은 증상을 앓는 사람이 있고, 완치 환자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정하운은 너무 일찍 터진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갸웃하던 그녀는 결심했다는 듯, 허리를 꼿꼿이 펴고 무릎 위에 두 손을 바르게 포갠 뒤 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공식 보고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지만, 강무훤 씨와 같은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이 차츰 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제가 진행했던 케이스는 모두, 실패했습니다.”
 
정하운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조금도 미안하거나 주저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뻔뻔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당당한 답변이었다. 나를 처음 보고도 정하운이 놀라지 않은 이유만큼은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내가, 왜 해야 합니까?”
 
죽음을 각오했을 때만 삶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확신도 없이 목숨을 건 도박을 하라는 겁니까?”
 
“0.1퍼센트의 승리와 100퍼센트의 패배, 어느 쪽에 걸어야 할까요?”
 
서명한 뒤엔 내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믿으면 됩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강무훤 씨 자신을.”
 
아무리 물어도 손에 잡히는 건 없었다. 나는 정하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더 잃을 것은 없었다. 이미 죽으려 했었다. 지켜야 할 가족이 없었으므로 나로 인해 마음 아파할 사람도 없었다. 치매로 요양원에 들어간 아버지조차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으므로, 먼저 죽어도 불효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게 사기라 해도 빼앗길 재산도 없었다. 어차피 죽음밖에 남은 게 없다면 도박할 가치는 충분했다.
 
나는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도망치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창밖에는 흐릿하고 뿌연 기체가 강물처럼 흘러 다녔다. 산 정상에 선 것처럼 건물 밖은 짙은 안개구름에 에워싸여 있었다. 그만큼 높은 건물인가?
 
내가 살아남는 것이, 당신에게도 중요합니까?”
 
나는 정하운을 향해 돌아섰다. 사무적인 질문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내 목적이었다. 나는 달려가 당장이라도 끌어안을 것처럼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 욕망이 정당하다고 믿어서가 아니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라도 내가 아직 살아있다고 외치고 싶은, 의지와 사력을 다한 절박한 응시였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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