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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국지 [271] 살수대첩 ⑤
여기서 지체했다가는 양광을 놓칠 수도 있으니 서두릅시다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2-19 06:30:20
 
 
고구려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우리나라 강토를 짓밟은 수군에 대한 원한이 뼛속까지 사무쳐 있었다. 쉬지 않고 행군한 덕에 어둠이 내릴 무렵에는 수군의 진영에 닿을 수 있었다. 이들은 소리를 죽이고 수나라 진영으로 다가갔다.
 
이때, 수군은 오랜 주둔으로 군기가 극도로 해이해져 있었다. 살수에서의 참패로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수양제는 패잔병들을 따로 격리했다. 그래서 병사 대부분은 아직도 30만 별동대가 전멸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날, 수양제는 군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고자 특별히 술과 고기를 하사했다. 요동성 서남쪽에 주둔한 수나라 군사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신나게 술판을 벌였다.
고구려 군사들이 제아무리 용맹하다 한들 우리의 대군을 당해낼 수 있나!”
그렇지. 저 요동성의 군사들도 조만간 성문을 열고 항복할 걸세.”
수군들은 저희끼리 씨부렁거리며 술과 고기를 먹더니 대취해 갔다.
보초를 서고 있던 군사들도 사정은 매한가지였다. 그들은 낮부터 잔뜩 술을 마셨기에 취기가 올라 졸고 있었다.
 
술시를 지나 해시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수군 진영 곳곳에서 화광이 충천했다. 북소리와 쇳소리, 그리고 고구려군의 고함이 온 천지를 진동시켰다. 막사에서 자고 있던 수군들이 깜짝 놀라 튀어나왔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고구려 군사들이 그들을 향해 활을 쏘고 장창을 휘둘러댔다. 여기저기서 수나라 군사들의 비명이 들렸다. 고구려군은 한 놈이라도 놓칠세라 베고 찌르면서 온 진영을 헤집고 다녔다.
요동성의 고구려 군사들도 성문을 열고 합세했다. 처참한 살육전은 이튿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수나라 군사들의 피가 요동성 앞의 대지를 적셨다. 간신히 살아남은 수군들은 양제가 있는 육합성으로 도망쳤다. 이때, 죽은 수군이 군속을 합해 10만 명이 넘었다. 그에 비해 고구려군은 5백 명 정도의 사상자를 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겨울을 맞는다는 것은 수군으로서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수양제는 마지못해 철군을 결심했다. 그러나 후퇴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을지문덕이 순순히 수군을 돌려보낼 리가 없었다. 장수와 군사들 역시 간절히 철군을 원하고 있었다. 고구려군은 그들에게 악몽 같은 존재로 각인됐다. 다시 서로 마주치게 된다면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 될 것이었다.
마침내 양제의 철군 명령이 떨어졌다. 수군은 어느 때보다 일사불란하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철수를 개시했다.
요하에 도착하니 천만다행으로 건너올 때 사용했던 부교가 온전히 남아 있었다. 양제와 친위대가 먼저 부교를 건넜다. 그 뒤로 수나라 군사들과 인부들이 따랐다.
이때, 강가 언덕 수풀 속에서 한 장수가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바로 고구려 장군 임유였다. 을지문덕의 명을 받고 진작부터 강가에 매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유의 신호가 떨어지자 궁노수들이 요하를 건너는 수군을 향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수나라 군사들은 파리 목숨처럼 죽어 나갔다.
수나라 장수 하나가 창을 높이 휘두르며 큰소리로 외쳤다.
동요하지 마라! 방패를 들어 막아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날아온 화살이 장수의 목덜미에 꽂혔다.
수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강을 건너다 죽은 자가 무려 3만에 육박했다.
 
수군을 몰아낸 을지문덕은 요동성에 입성했다. 수나라 대군을 맞아 수개월이나 잘 막아 냈던 요동성주 고연탁은 공방전에서 유시(流矢)를 맞아 이미 저세상 사람이 돼 있었다.
도원수는 고연탁의 가묘 앞에 나아가 세 번 절한 후에 크게 통곡하고, 그의 공을 기렸다. 그리고 그동안 성을 굳건히 지킨 요동성의 군민을 일일이 위로했다.
이튿날, 을지문덕은 군사들의 태세를 정비하고 영주를 수복할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만리장성을 넘어 수나라 영토 깊숙한 곳까지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평양에서 칙서가 당도했다. 을지문덕이 지난번에 평양으로 사람을 보내 수나라 공격에 대한 국왕의 재가를 청한 바 있었다.
칙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번 전쟁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더구나 수나라는 그리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그들에게 우리의 위엄을 보여 주었으니 이쯤에서 전쟁을 끝내라.
 
을지문덕은 허탈했다. 전쟁에서 승세를 탔을 때는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수나라 군사들이 제아무리 많다 한들 지금은 단지 지리멸렬한 패잔병이자 오합지졸일 뿐이었다.
도원수는 직접 영양왕을 배알하고 진언을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곧바로 요동을 떠나 밤낮없이 말을 갈아타며 달렸다. 그래서 수일 만에 평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양성에서는 을지문덕 장군의 개선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궁 앞에 이르니 영양왕이 전갈을 받고 몸소 나와 맞았다. 국왕을 따라 어전에 들어선 을지문덕은 예를 갖추고 아뢰었다.
폐하, 지금 달아나는 수군을 추격하면 만리장성을 넘어 탁군까지도 진격할 수 있습니다. 윤허해 주십시오.”
영양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이 수나라를 정벌할 절호의 기회임을 짐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전쟁으로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전쟁이 길어지면 백성의 고통이 더 커질 텐데, 짐이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겠느냐.”
을지문덕은 물러서지 않았다.
저들을 이대로 보낸다면 조만간 다시 쳐들어올 겁니다. 그때에도 그들을 막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들은 이번 전쟁으로 엄청난 피해를 봤다. 두고 봐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내란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동안 힘을 길러 두었다가 때가 되면 저들을 응징하고, 우리 조상의 땅을 수복하면 된다.”
영양왕의 말이 정연했기에 을지문덕은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한편, 도원수가 요동성을 비운 사이 성주부에 모인 고구려 장수들은 울분을 터뜨리고 있었다. 수군은 굶주린 들개 떼를 만난 닭들처럼 정신없이 달아나고 있는데 고구려군은 기세 좋게 수군을 쫓다가 군대를 돌려야 했기 때문이다.
성격이 괄괄한 임유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어찌 우리 강토를 짓밟은 원수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있단 말이오! 난 도저히 참을 수 없소. 당장 쫓아가서 저놈들의 씨를 말려야 하오.”
그는 누구보다도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고 의협심이 남달랐다.
장군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우리 성주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저들을 곱게 보낸다면 훗날 저승에 가서 무슨 면목으로 그분을 뵌단 말입니까.”
요동성주의 부장 의경이었다. 그는 장렬하게 전사한 고연탁을 떠올리며 수군을 추격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에 요동성의 장수인 용호(龍虎)와 마대(馬帶)가 거의 동시에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동조했다. 성주부는 수군에 대한 적개심으로 활활 타올랐다.
 
이때 을지문덕의 부관인 고중이 나서며 좌중을 진정시켰다.
더는 수군을 쫓지 말라는 폐하의 엄명이 있었소. 더구나 도원수께서 안 계신 마당에 우리끼리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오.”
임유가 핏발 선 눈으로 고중을 쏘아봤다.
원수들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도 손 놓고 있어야 한단 말이오?” 
고중은 침착하게 임유를 다독였다.
도원수께서 도성으로 가셨으니 폐하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오. 곧 수군을 추격하라는 명이 떨어질 테니 기다려 봅시다.”
용호가 발끈하며 나섰다.
도성에서 보낸 전령이 당도하기를 기다리다가는 적들을 모두 놓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손아귀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고중은 용호의 반박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 역시 수나라 군사들이 도망가게 놔 두라는 왕명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임유가 고중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고 장군, 장수들의 뜻이 한결같은데 어찌 이를 막으려 하시오. 우리가 도적들을 쫓아가 섬멸하면 훗날 폐하께서도 잘했다고 하실 거요.”
임유는 장수들을 둘러보며 결론을 내렸다.
도원수의 대리로서 명을 내리겠소. 장군들은 당장 군사들을 소집하고 수군을 추격할 채비를 하시오.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장수들은 우렁찬 소리와 함께 밖으로 뛰어나갔다. 고중도 하는 수 없이 이들을 따라나섰다.
 
임유는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요하를 건너 달아난 수군을 맹렬히 뒤쫓았다. 이미 멀리 갔는지 수군의 후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고구려군은 조급한 마음에 더욱 속력을 냈다.
추격군이 이틀 밤낮을 꼬박 달려 의무려산(醫巫閭山) 기슭에 이르렀을 때였다.
후위에 있던 고중이 임유의 옆으로 급히 말을 몰아 오더니 주위를 환기했다.
수주 양광은 간계가 뛰어난 자요. 내가 방금 산세를 살폈는데 너무나도 적막하고 새소리마저도 들리지 않는구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소. 우리가 쫓아올 것에 대비해 군사를 매복시켜 놓았을지도 모르오. 먼저 주변을 살핀 후에 나아가는 것이 좋겠소.”
임유가 호탕하게 웃었다.
꽁지가 빠지게 도망간 놈들이 무슨 정신으로 복병을 두겠소. 걱정은 거두시구려. 여기서 지체했다가는 양광을 놓칠 수도 있소. 서두릅시다.”
임유는 고중의 말을 무시하고 군사들을 더 재촉했다.
고구려군이 의무려산 아래로 내려섰을 때였다. 갑자기 산 위에서 북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숲속에서 수나라 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용케 여기까지 쫓아 왔구나. 나 왕인공이 이곳에서 너희를 기다린 지 오래다.”
왕인공은 수양제의 명을 받고 혹시 있을지 모를 고구려군의 추격에 대비해 매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군은 비록 큰 손실을 보고 후퇴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왕인공의 부대도 고구려의 추격군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수효였다.
양군 사이에 불꽃 튀는 접전이 벌어졌다. 기습에 놀라 잠시 주춤했던 임유는 곧 정신을 가다듬고 달려드는 수군을 베어 나갔다. 임유의 창이 허공에서 춤출 때마다 수나라 군사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목을 베라!”
임유는 싸움이 끝나면 제단을 준비하고, 저들의 목을 제물 삼아 앞서 간 전우들의 고혼을 위로할 작정이었다. 그는 수군을 베어 사방에 피를 뿌리는 가운데도 틈틈이 주변에 있는 고구려 군사들을 독려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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