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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 559년, 병석에 누워 있던 양원왕이 죽고 장자인 양성이 왕위를 이었다. 이가 바로 고구려 제25대 임금인 평원왕(平原王)이다.
평원왕은 내분에 휩싸였던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왕실의 살림을 줄여 재난을 당한 백성을 구휼하고, 농업과 상업을 장려하여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동안 진행하던 장안성 축조(築造)를 일시적으로 중단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평원왕은 주변 국가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신라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나제동맹을 무력화시켰고 그들을 통해서 백제를 견제하여 남방의 안정을 가져왔다. 또한 패권을 다투고 있던 서방의 진(陣)과 북제에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평원왕의 노력은 차츰 결실을 얻어 내란의 상처를 치유하고 민심을 수습했다. 고구려는 하루가 다르게 안정됐다.
어느 따스한 봄날 오후였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궁중의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 바위라도 쪼갤 듯 시끄러운 소리의 출처는 공주가 거처하는 내궁이었다.
평원왕의 금지옥엽인 평강(平岡)의 방에서 시녀들이 한바탕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국왕이 끔찍이 아끼는 탓에 버릇이 나빠진 공주는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면 울음부터 터뜨렸다. 왕후는 물론 모든 궁인은 임금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공주가 원하는 일은 뭐든 해 주어야 했다. 그렇게 날이 갈수록 공주의 울음은 잦아졌고 그 소리 또한 커졌다.
하루는 공주가 궁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시녀들을 조르고 있었다. 하지만 왕의 허락 없이 공주를 궁 밖으로 데리고 나갈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국사가 바쁜 왕에게 가서 허락을 구할 수도 없었다. 왕후까지 불사를 위해 절에 간 터라 시녀들은 난감하여 진땀을 흘렸다.
시녀 옥란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공주를 달래려 했지만 공주의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벌써 한 시간은 족히 울어 목이 쉴 정도였지만 평강은 지치지도 않는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옥란은 이러다가 공주가 혼절하는 건 아닌가 싶어 겁이 났다.
이때 임금의 행차를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녀들은 황급히 왕을 맞이하러 나갔다.
평원왕은 근엄한 표정으로 들어오다가 공주를 보자 금방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울었느냐?”
평원왕은 시녀들을 바라보며 힐책하듯 물었다. 옥란은 황공하여 머리를 들지도 못하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왕은 공주를 무릎에 앉히고 어르며 일렀다.
“밖은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았단다. 잘못하면 고뿔에 걸릴 수 있어. 날이 좀 풀리거든 그때 아비랑 같이 나가자꾸나.”
공주는 나갈 수 없는 이유를 자상하게 설명해 줘도 막무가내였다.
평원왕은 앞뒤 가리지 않고 울기만 하는 공주를 보고 있자니 성질이 났다.
“그만 울음을 그치래도!”
공주의 울음은 한여름의 매미 소리처럼 줄기차게 이어졌다. 목적을 이루지 않고는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공주의 울음을 그치게 할 방법을 고민하던 왕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공주에게 엄포를 놓았다.
“계속 울면 저자의 바보 온달(溫達)에게 시집 보낸다.”
공주는 겁을 먹었는지 울음을 뚝 그쳤다. 이를 신통하게 여긴 평원왕은 이후로도 공주가 울기만 하면 온달 얘기를 꺼냈다. 그때마다 공주는 어김없이 눈물을 거두었다. 궁궐 사람들은 공주가 온달을 몹시 무서워한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 평강은 아름다운 처녀로 자라났다. 공주의 발그레한 볼은 만개한 복사꽃처럼 탐스러웠다. 머릿결은 흑단처럼 윤기가 흘렀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옷깃에서 은은한 찔레꽃 향기가 풍겼다.
평강은 외적으로만 성숙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서는 어린 시절 고집불통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철이 들면서 공주로서의 예법과 마음가짐을 가다듬어 지혜롭고 속 깊은 여인으로 성장했다.
평원왕은 공주를 볼 때마다 흐뭇했다. 어려서 고집부리며 울기만 할 때는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이제는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지혜롭고 아리따운 처녀였 다.
고구려 도성의 귀족 청년치고 공주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고관대작의 부인들은 왕후를 배알하는 자리에서 은근히 관심을 드러냈고, 그중 용기 있는 자는 혼사를 언급하기도 했다.
주변 상황이 이러하니 공주를 마냥 어리게 보고 있던 왕후도 혼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왕후는 왕을 찾아가서 의논했다.
“우리 공주도 이제 다 컸으니 시집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원왕도 벌써 생각하고 있던 터였기에 왕후에게 넌지시 물었다.
“공주의 배필로는 누가 좋겠소?”
“들은 바로는 고흘의 아들이 문무를 겸비하고 인품이 훌륭하다 합니다.”
“고흘의 아들이라면 대형 고진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지난날 환도성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고삭의 손아래 동생입니다.”
평원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면 우리 평강의 배필로 부족함이 없을 것 같소.”
국왕은 고흘에게 혼담을 넣기로 마음을 굳혔다.
다음 날, 평원왕은 평강의 처소를 찾았다. 공주는 공손히 부왕의 행차를 맞았다.
“이제 너도 시집갈 때가 됐구나. 네 어미와 의논한 결과 고흘의 아들 고진에게 혼담을 넣기로 했다.”
평강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가 고개를 들고 부왕을 똑바로 바라봤다.
“제게는 이미 정해진 낭군이 있습니다.”
공주는 어느새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고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원왕은 공주의 말을 듣고 놀라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러자 공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어릴 때부터 폐하께서 늘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내겠다고. 그런데 지금 와서 다른 사람과 혼인하라니요. 필부도 식언(食言)하지 않거늘 일국의 지존(至尊)이신 폐하께서 한 입으로 두말하시면 되겠습니까. 소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국왕은 공주의 당돌한 태도에 크게 노했다.
“아비의 말을 따르지 않는 딸을 어찌 자식이라 할 수 있느냐. 이미 결정한 일이니 더는 왈가왈부하지 마라.”
평원왕은 화가 치밀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주의 처소를 떠났다.
평강은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있다가는 꼼짝없이 부왕의 뜻에 따라 혼인을 해야 할 판이었다. 얼굴 한 번 본 적은 없어도 마음속에 지아비로 품고 있던 온달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날 밤 평강은 시녀의 옷으로 갈아입고 값나가는 패물들을 챙겨 궁궐을 몰래 빠져나왔다. 무턱대고 나오기는 했지만 궁 밖은 공주에게 낯선 세상이었다. 온달을 찾아갈 마음으로 나왔는데 정작 그가 어디에 사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서 있을 수도 없었기에 공주는 어두운 밤길을 무작정 걸었다.
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 보니 어디선가 야경꾼이 치는 딱따기 소리가 들려왔다. 평강은 야경꾼의 눈을 피해 길가에 있는 초가집으로 들어갔다. 마당에 쌓아 놓은 나뭇단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자니 딱따기 소리가 조금씩 멀어져 갔다.
평강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방문이 열리면서 노파의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 누구요?”
공주는 놀라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노파는 공주를 발견하고 범상한 말투로 물었다.
“대갓집 아가씨 같은데 무슨 일로 이런 누추한 곳에 납시었소?”
공주는 금방 그럴듯한 거짓말을 지어냈다.
“전 우씨 댁의 시녀입니다. 저자에 나갔다가 불한당에게 납치됐습니다. 그들은 저를 외딴 데로 끌고 가 광에 가뒀습니다. 천만다행으로 그들이 술을 마시고 곯아떨어진 틈을 타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평강은 지난날 시녀에게 들었던 저자에서 벌어진 흉악한 일을 마치 자신이 겪은 것처럼 얘기했다.
인정 많은 노파는 공주의 말을 그대로 믿고 안으로 들게 했다. 방 안으로 들어가 한숨을 돌리고 나니 그제야 방 안의 정경이 공주의 눈에 들어왔다. 흙으로 다져 만든 아궁이 위에 쪽구들이 자리하고, 한쪽에는 솥과 시루가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로 동이·항아리·밥그릇·접시 등이 잡다하게 널려 있었다. 방 안에서 취사를 비롯한 모든 생활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호화로운 궁궐에서만 살아온 공주로서는 처음 보는 남루하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노파가 우두커니 서 있는 공주를 구들로 이끌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자도록 하오. 날이 새면 내가 함께 가 주리다.”
공주는 노파가 깔아 주는 요에 누웠지만 도통 잠이 오지를 않았다.
“저 혹시 온달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신 적이 있는지요?”
공주의 물음에 노파는 잠기가 가득 섞인 목소리로 대답한다.
“이 동네에서 바보 온달을 모르는 사람이 있으려고. 우리 집에도 가끔 나무를 해다 주곤 하지.”
평강은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났다.
“혹시 어디 사는지 아세요?”
노파는 공주가 갑자기 일어나는 통에 놀라서 잠이 달아났다.
노파의 말에 따르면 온달은 성 밖 대성산 아래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는 나무를 해서 내다 팔거나 저자의 허드렛일을 도왔다. 사람들과 시비할 줄 몰라 무슨 일을 당해도 그냥 웃기만 했고, 이미 장성했는데도 코흘리개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온달은 눈먼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돈이 생기면 어머니가 좋아하는 맛난 음식과 의복을 사다 드렸다. 그러면서 자신은 언제나 해진 옷을 입고, 끼니를 거르는 일도 예사였다. 행색이 이러하니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 부르며 놀렸다. 그런 말을 들어도 온달은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평강은 노파에게 들은 얘기가 시녀 옥란에게 들었던 것과 일치하자 매우 기뻤다. 이토록 순수하고 듬직한 사람을 낭군으로 점찍은 자신이 자랑스럽고 대견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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