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연재소설
우리나라 삼국지 [217] 관산성 전투 ④
너는 내 꾀에 넘어가 함정에 제 발로 뛰어든 거다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3-11-28 06:30:10
 
 
국조는 심호흡을 한 번 한 후에 활시위를 놓았다. 화살이 마치 굶주린 솔개처럼 신라 장수를 향해 날아갔다. 화살은 마상에 앉은 신라 장수의 심장에 깊숙이 박혔다. 그는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장수가 죽자 신라군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국조는 이를 보고 부여창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지금입니다. 저들이 혼을 빼놓고 있을 때 어서 피하십시오. 뒤는 제가 맡겠습니다.”
국조의 활 솜씨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던 태자는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신라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신라군이 뒤쫓으려 했지만 국조가 쏜 화살이 연달아 날아오는 바람에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덕분에 부여창은 목숨을 건져 사비성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도성으로 돌아온 태자는 약속한 대로 많은 군사가 도열한 가운데 국조를 크게 치하하고 백제 제일의 궁사로 인정했다.
 
뒤늦게 군사를 이끌고 삼년산성에 도착한 병관좌평 연회를 비롯한 장수들은 성왕의 죽음을 전해 듣고 완전히 넋을 잃었다. 그들은 마치 더듬이를 잃은 달팽이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산성을 함락시킨 무력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온다는 급보까지 전해졌다.
연회는 장수들과 함께 대책을 의논했다. 회의 분위기는 침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위사좌평 사무(沙武)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상황에서 적을 맞아 싸우는 건 무리요. 일단은 도성으로 퇴각한 후에 신라군에 대응할 방책을 마련합시다.”
장군 차주(車柱)가 나서며 반대했다.
어찌 그리 비겁한 말씀을 하시오. 신의를 저버리고 제 욕심만 채운 신라를 응징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들을 섬멸하여 원통하게 돌아가신 폐하의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후퇴하자는 쪽과 싸우자는 쪽이 팽팽하게 맞섰다. 시간이 지나도 쉽게 결론을 나지 않았다.
답답해진 연회가 나섰다.
한가롭게 입씨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오. 지금 신라군이 지척에 당도해 있소. 이제 더는 달아날 곳도 없단 말이오. 도성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내신좌평 일파가 우리를 가만두겠소. 분명히 패전의 책임을 물을 것이오. 진퇴양난 속에서 우리에게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소. 무조건 신라군과 싸워서 이기고 당당하게 도성으로 돌아가는 것이오.”
연회의 말이 백번 옳았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삼년산성은 규모가 작아 신라의 대군을 맞아 싸우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백제군은 성을 떠나 청산(靑山)으로 이동했다. 신라군이 알아채지 못하게 후방을 기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신라 장군 김무력은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관산성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도 삼년산성에 있는 백제군의 움직임을 상세히 보고받고 있었다. 그랬기에 백제군이 청산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무력은 청산에 군사를 매복시킨 후에 백제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연회가 이끄는 백제군이 청산에 당도했을 때는 찬바람이 스산하게 불었다. 어느덧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있었다.
성왕을 잃고 낙담한 데다 계속되는 행군으로 지친 백제 군사들은 매우 예민해져서 수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연회는 군사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위엄 있게 선두에 서서 나아갔다.
이때 대열 앞으로 커다란 나뭇짐을 진 촌부(村夫)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연회를 시종하던 장수가 큰 소리로 길을 비키라고 외쳤다. 촌부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느린 걸음으로 묵묵히 자기 길을 갈 뿐이었다.
이에 화가 난 장수가 호통을 쳤다.
네가 감히 대백제국의 군대를 능멸하려 하느냐?”
그때야 뒤를 돌아본 촌부는 기겁하고 땅에 엎드렸다.
소인이 귀가 어두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느냐!”
장수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말채찍을 들어 내리치려 했다. 겁에 질린 촌부가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이때 연회가 말리고 나섰다.
함부로 다루지 말고 이리 데려오너라.”
명이 떨어지자 장수는 말에서 뛰어내려 촌부를 끌고 좌평의 앞으로 나아갔다.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연회가 큰 소리를 말하자 촌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입 모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좌평은 목소리를 줄였다.
이 부근에서 신라군을 본 적이 있느냐?”
신라군은 그림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본시 그 지역에 사는 주민에게 물어보는 것이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연회는 촌부의 말을 듣고 일단 안심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옥천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느냐?”
촌부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저기 보이는 갈림길에서 서쪽 길을 따라가면 산이 나오는데 그 산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큰 바위가 나타납니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돌아 오솔길을 따라가다가 등성이를 넘으면 바로 관산성으로 통하는 길이 보일 겁니다.”
 
연회는 신라군이 근처에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자신들의 움직임이 노출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경계한다 해도 백제군이 험한 산길을 따라 이동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할 것이었다.
연회는 촌부가 알려준 대로 갈림길에서 서쪽 길을 택해서 나아갔다. 한참을 가다 보니 제법 험해 보이는 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제 군사들은 좌평이 앞서 산길을 올라가자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연회는 군사들의 불만을 모른 체하고 묵묵히 앞장서서 걸었다. 그런데 아무리 올라가도 바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산길이 이어지자 그는 덜컥 의심이 들었다. 그의 불안감이 커지는 만큼 군사들의 불만도 팽배해졌다.
한참을 가다 보니 왠지 계속해서 제자리를 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사방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어느덧 짙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산에서 밤길을 걷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없었다. 연회는 그 자리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이미 겨울이 부쩍 다가왔는지 밤이 되니 매서운 추위가 밀려왔다. 군사들은 언 몸을 녹이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서 모닥불을 피웠다.
연회는 앞으로의 일이 걱정됐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게 분명했다. 몸을 뒤척이다가 잠에 빠져들 무렵 갑자기 사방에서 횃불이 일더니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어서 벌 떼처럼 화살이 날아왔다. 고된 행군에 지쳐 곯아떨어져 있던 백제 군사는 일어날 틈도 없이 화살을 맞아야 했다.
연회는 신라군의 기습을 깨닫고 재빨리 일어나 몸을 피했다. 코앞도 보이지 않는 산길을 뛰다 보니 나뭇가지에 갑옷이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얼굴과 팔다리가 찢겨 피가 나기도 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함성이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쫓는 자가 없었다. 연회는 우선 숨을 만한 곳을 찾기 위해 주변을 더듬거렸다.
이때 그가 발견한 것은 속이 빈 아름드리 고목이었다. 연회의 몸이 충분히 들어갈 정도로 안쪽 공간이 넓었다.
연회는 숨을 죽인 채로 몸을 숨기고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언제 적군의 수색이 벌어질지 몰랐기에 그는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아직도 병사의 비명이 희미하게나마 들리는 듯했다.
 
연회가 눈을 뜨니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서도 깊은 잠에 빠졌던 것이다. 좌평은 화들짝 놀라서 고목의 틈으로 주위를 살펴봤다. 무성한 숲속에서 산새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연회는 일단 안심하고 구멍 밖으로 나왔다. 그가 간신히 땅을 밟고 섰을 때 어딘가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서 쳐다보니 어제 길을 가르쳐 주었던 촌부가 서 있었다.
좌평은 촌부를 보자 그동안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화가 치밀었다. 그는 차고 있던 단도를 빼 들고 촌부에게 달려들었다. 이 모두가 그가 길을 잘못 알려줬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촌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가볍게 단도를 피했다. 연회는 제풀에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촌부가 껄껄 웃더니 말했다.
어리석구나. 아직도 속은 줄을 모르느냐. 나는 신라 장군 미진부(未珍夫). 너는 내 꾀에 넘어가 함정에 제 발로 뛰어든 거다.”
그제야 연회는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호랑이의 꼬리에 현혹되어 시뻘건 아가리에 머리를 디민 줄도 몰랐던 것이다.
연회는 자신의 우매함으로 많은 군사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처연히 절규하더니 손에 든 단도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진부도 막을 수 없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적장을 보며 신라 장수는 한탄했다.
한순간의 방심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구나.”
미진부는 다시 노래를 부르며 산길을 내려갔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0
감동이에요
0
화나요
0
슬퍼요
0
오늘자 스카이데일리
주요 섹션 기사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새문안로 26 청양빌딩 7층 | 전화 : 02-522-6595~6 | 팩스 : 02-522-6597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시 아01703, 등록일 : 2011년 7월 18일, 대표이사·발행인·편집인: 조정진, 편집국장: 고동석
copyrightⓒ2011, All rights reserved. Contact : skyedaily@skyedaily.com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선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