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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국지 [215] 관산성 전투 ②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섬기는 법이다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3-11-24 06:30:10
 
이 말들만 봐도 너의 재주를 알고도 남겠다. 앞으로 나의 말들을 관리해라.”
도도는 성왕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신라 사람이 어찌 백제 임금을 주군으로 섬길 수 있겠습니다. 그 명은 받들 수 없으니 저를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소서.”
성왕은 사내의 기상에 탄복했다.
말들이 이처럼 훌륭한 것은 모두 너의 충심 때문이구나.”
성왕은 도도를 풀어 주고 언제든지 마구간에 드나들 수 있도록 허락했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병관좌평 연회는 성왕에게 달려와 간했다.
도도는 믿을 수 없는 자입니다. 만일 나쁜 마음을 먹고 폐하를 해치려 한다면 어찌하려 하십니까.”
한낱 마구간지기가 짐을 어찌 해하겠소.”
성왕은 담대하게 웃었다.
연회는 불안한 마음을 거둘 수 없었다. 그래서 수하들을 시켜 마구간지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토록 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도도는 마구간 외에는 자신의 처소를 벗어나지 않았다.
 
며칠 후 성왕은 국원으로 가는 장도에 올랐다.
길을 떠나기 전에 그는 도도를 조용히 불렀다.
내가 이번 원정길에서 돌아올 때까지 잘 생각해 봐라. 골품제가 확고한 신라에서 너처럼 미천한 신분으로 출세할 수 있겠느냐. 자고로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섬기는 법이다.”
성왕은 뼈 있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백제 왕의 진심이 도도의 가슴에 와 닿았다. 처음으로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고 군마를 책임지는 자리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도도는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조국인 신라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그는 우직하고 고집스러운 사내였다.
 
한편 태자 부여창은 관산성에 머물며 도성에서 올라오는 나랏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 역시 전장으로 나가 공을 세우고 싶었지만 언제 있을지 모를 신라군의 반격에 대비해 후방을 지켜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여창이 집무실에서 장계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번을 서던 장수가 뛰어 들어와 다급히 아뢰었다.
신곡(新谷)에 나간 척후가 보고하길 낭비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 장군 김무력이 군사를 모아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다 합니다.”
그들의 병력이 얼마나 되느냐?”
대략 3~4만은 족히 될 것이라 합니다.”
부여창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성을 지키고 있는 병력만으로는 신라군을 당해 내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신주를 단숨에 평정할 정도로 용병술이 뛰어난 김무력이 진두지휘한다면 여간 어려운 상대가 아닐 것이었다. 태자는 먼저 부왕에게 전령을 보내고 나서 도성에 연락을 취하여 구원군을 보내도록 했다.
이때 백제의 도성에서는 내신좌평 백협(苩協)이 정사를 관장하고 있었다.
백협은 부여창의 구원 요청을 받고 여러 귀족을 불러 논의했다.
달솔 진속(眞粟)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당장 군사를 보낼 필요가 없소. 지금 구원군을 보내지 않으면 태자는 필시 패전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국왕도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우리가 나서서 신라와 화평을 맺는다면 왕의 기세도 꺾일 겁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백협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우리 군사가 신라군에게 패하면 나라 전체가 흔들릴 거요. 신라 왕은 욕심이 많은 자요. 이러다 큰일 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소. ”
내솔 해공(解貢)이 고개를 번쩍 들고 거품을 물었다.
왕은 그동안 우리를 무시하고 모든 일을 독단으로 처리했소. 이번 신라와의 싸움만 해도 우리가 얼마나 반대했소. 이제까지는 그의 힘에 눌려서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지만 이번에야말로 우리의 힘을 보여 줘야 하오. 절대 구원군을 보내서는 안 되오.”
그 자리에 모였던 대신들이 하나같이 구원군 파견에 소극적이었기에 백제의 도성에서는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낭비성을 출발한 신라군은 관산성으로 가는 길에 삼년산군을 지나게 됐다. 무력은 관산성을 치기 전에 삼년산성부터 점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이 성을 그냥 두고 관산성을 공격하면 배후에서 공격을 당할 우려가 있었다.
신라군이 삼년산군의 산곡(山谷)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무력이 돌아보니 후위의 군사들이 한 사내를 묶어 말 위에 실은 채 달려오고 있었다. 의아하여 쳐다보고 있자니 눈매가 날카롭고 몸집이 호리호리한 군사가 먼저 도착해 보고했다.
이 자가 저쪽 수풀에 숨어 우리를 훔쳐보고 있기에 잡아 왔습니다. 간자가 틀림없습니다.”
다른 군사들이 사내를 말에서 끌어내리더니 무력 앞에 무릎 꿇렸다.
저는 간자가 아닙니다. 엄연한 신라의 군사입니다.”
무력은 사내의 말을 듣고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삼년산성에 있던 군사냐?”
사내는 장군이 자신을 알아주자 금세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습니다. 백제군의 포로가 되어 삼년산성에 갇혀 있었습니다.”
사내는 자신이 그동안 겪었던 일을 소상히 아뢰었다.
그는 맹복(孟福)이라는 자로 본시 도성의 대장장이였다. 신라와 백제의 싸움이 본격화되면서 무기를 만드는 일에 차출된 후 삼년산성으로 보내졌다. 그는 병장기를 제조하는 임무를 맡아서 화살촉과 창날·칼날 등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삼년산성이 백제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포로 신세가 됐다.
성왕은 관용을 베풀어 사로잡은 신라 군사들을 자신의 휘하에 거두고 본래 맡았던 일을 하게 했다. 맹복은 도성에 가족을 두고 왔기에 무기를 만들면서도 늘 탈출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감시가 삼엄하여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다.
맹복은 자신과 같은 처지인 도도에게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으며 울적한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도도가 은밀히 맹복을 찾아왔다. 그는 백제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에 별다른 제약 없이 성안을 돌아다녔다.
도도는 주변을 살피면서 맹복을 마구간으로 끌고 갔다.
김무력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관산성을 공격하기 전에 이곳을 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네. 자네도 알다시피 삼년산성은 쉽게 점령할 수 있는 곳이 아니네. 더구나 주둔한 백제군이 수는 적어도 하나같이 용맹하지 않은가.”
그렇지. 이곳처럼 험한 산성도 없지.”
신라군이 이곳을 공격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 관산성이나 백제 도성에서 구원군이 온다면 앞뒤로 공격을 받는 형국에 놓일 걸세.”
이곳은 신경 쓰지 말고 관산성을 바로 공격해야 한다는 말이군.”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이 길로 성을 빠져나가 산곡으로 가 주게. 신라군이 그곳에 이르면 김무력 장군에게 이곳 사정을 전달하고 바로 관산성으로 가시라 말씀드려 주게.”
신라군의 움직임으로 성내의 경계가 한층 삼엄해졌네. 어찌 빠져나간단 말인가?”
도도는 맹복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닥거렸다. 말이 끝나자 대장장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막힌 계책일세. 그럼 자네는 어찌하려는가?”
나는 여기서 할 일이 있네. 반드시 김무력 장군에게 이곳 사정을 전해야 하네.”
도도의 태도는 결연했다.
다음 날 날이 밝자 도도는 마구간에서 가장 뛰어난 말을 끌고 맹복과 함께 남쪽 성문 앞에 당도했다. 성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도도를 막아서며 물었다.
어디를 가는 거요?”
도도가 말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폐하께서 아끼는 말인데 그동안 제대로 운동을 하지 못해서 몸 상태가 매우 나빠졌네. 계속 이리 가둬 두면 큰 병이 들 것이네. 폐하께서 떠나시며 나에게 이 말을 잘 돌보라 신신당부하셨는데 병에 걸리면 그 뒷감당을 어찌한단 말인가.”
마구간지기가 임금을 들먹이자 난처해진 군사는 수문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수문장은 국왕이 도도를 아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시기에 함부로 산성 밖으로 사람을 내보낼 수는 없었다.
수문장은 최대한 예우를 갖춰 도도에게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지만 당신을 성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는 폐하의 엄명이 있었소.”
도도는 수긍하는 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소. 그러면 이 마부를 시켜서 말을 달리게 하면 되지 않겠소.”
도도는 마부로 가장한 맹복을 가리켰다.
수문장이 그래도 망설이자 도도는 순식간에 얼굴색을 바꾸며 으름장을 놓았다.
좋소. 이만 돌아가리다. 말이 병들게 되면 그대의 책임이라 폐하께 고하겠소.”
겁을 먹은 수문장은 마지못해 맹복과 말을 내보냈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마라. 충분히 운동을 시켰다 싶으면 서둘러 돌아와야 한다.”
수문장은 마부에게 신신당부했다.
이렇게 해서 맹복은 성을 빠져나와 무력에게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무력은 맹복을 통해 삼년산성의 상황을 파악했다. 성안에 주둔하고 있는 백제군의 수가 적다면 굳이 점령할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는 지체 없이 바로 관산성으로 가는 게 나았다. 무력은 문득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맹복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의 말이 사실이라면 굳이 삼년산성을 치느라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우리가 바로 관산성을 공격하면 백제 왕이 틀림없이 구원하러 올 것이다. 그 도중에 삼년산성에 들를 테니 그때 그를 암살해라. 너는 돌아가서 도도에게 나의 뜻을 전하라.”
맹복이 다시 성으로 돌아가면 무사할 리 없었다. 그래도 조국 신라를 생각하면 해야 할 일이었다. 대장장이는 마음을 독하게 다잡았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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