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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호의 명을 받은 유주자사 풍환(馮煥)이...'))
서력 121년, 한주(漢主) 유호의 명을 받은 유주자사 풍환(馮煥)이 국경을 넘어 예맥성으로 쳐들어왔다. 예맥 성주 사애(沙愛)는 급히 도성으로 전령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태조왕은 신하들을 불러 대책을 의논했다.
“한군이 쳐들어온 이유가 무엇인가?”
좌보 을음이 아뢴다.
“한왕의 실정으로 백성의 불만이 드높습니다. 백성의 원성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리하게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렇기에 병사들은 싸울 의지가 없을 겁니다. 우리로서는 결코 불리하지 않으니 한번 싸워 볼 만합니다.”
“누가 나가서 저들을 막아 내겠는가?”
“폐하, 신이 감당하겠습니다.”
체격이 장대한 사내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서출 왕자인 수성(遂成)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담이 크고 훤칠한 미장부였으며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운 명장이었다.
“네가 나서 준다면 근심을 크게 덜 수 있겠구나.”
태조왕은 수성에게 군사 1만을 내주고 우태 미유(彌儒)와 어지류(菸支留)·조의(皁衣) 양신(陽神) 등의 장수를 딸려 보냈다.
예맥성은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애당초 성을 지키는 2천의 군사로 한나라의 대군을 막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유주자사 풍환은 예맥성에 당도하자마자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자사의 명을 받은 요동태수 채풍(蔡諷)은 성의 동쪽, 현도태수 요광(姚光)은 서쪽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한군은 성벽을 오르는 족족 죽어 나갔다. 그래도 한나라 군사들의 공격은 끊이지 않았다. 군사의 수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한군이 성벽 위를 새카맣게 뒤덮었다. 사력을 다해 싸우던 예맥성주는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성주가 죽자, 예맥의 군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풍환은 첫 싸움에서 승리하자 자만에 빠졌다.
“고구려군도 별거 아니구나. 머지않아 고구려왕을 무릎 꿇릴 수 있겠구나.”
당장에라도 고구려를 평정할 것 같은 기세였다.
고구려 지원군이 예맥 땅에 다다랐을 때, 패잔병들이 달려와 성이 함락되었다고 알렸다.
수성은 행군을 멈추고 장군들을 불러 모았다.
조의 양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적의 군세가 생각보다 대단한 듯합니다.”
우태 미유도 같은 생각이었다.
“한군의 수가 아군보다 월등히 많습니다. 일단 공격을 늦추고 도성에 전령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는 게 좋겠습니다.”
수성이 한참 듣고만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싸움은 수적인 우세로 하는 게 아니다.”
장수들은 조용히 수성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먼저 풍환에게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한다. 그들을 안심시킨 후, 내가 일대의 군사를 이끌고 성으로 가겠다. 미유 장군은 은밀히 군사를 움직여 성 근처에 매복하라. 기회를 보아 내가 한군을 도발한 후, 짐짓 퇴각하면 오만한 풍환은 앞뒤 가리지 않고 성을 나와 우리를 추격해 올 것이다. 그때 숨어 있던 미유의 군사가 움직여 성을 점령하라.”
수성이 어지류를 보며 일렀다.
“인근에 매곡이란 곳이 있다. 마치 매가 먹이를 끌어안은 형국이라 복병을 숨기기 좋은 곳이다. 장군은 그곳에 가서 매복하고 있다가 한군이 나타나면 공격하라.”
자신감 넘치는 지시에 장수들은 군말 없이 따랐다.
수성은 미유에게 군사 3천을 주어 먼저 예맥성으로 보내고, 어지류에게는 5천의 군사를 동반하여 매곡에 매복하게 했다. 그런 연후에 풍환에게 사자를 보내 항복의 의사를 밝혔다.
풍환은 고구려의 사자가 항복의 뜻을 전하자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병법에서 말하는 최상의 방책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 했다. 이를 이룰 수 있게 되었는데 어찌 마다하겠느냐! 항복을 받아들이겠노라.”
사자는 성안의 분위기를 살피고 고구려 본영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수성은 군사 2천을 이끌고 예맥성으로 다가갔다.
풍환이 성벽 위에서 고구려 군사들을 내려다보고 외쳤다.
“모두 무기를 풀어 놓고 맨몸으로 들어오라.”
“무장을 해제한다는 것은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버리는 것과 같소. 그 지시만은 따를 수 없소이다.”
수성이 의외로 무장해제를 거부하자 풍환이 노기를 드러냈다.
“본관의 명을 듣지 않으면 죽음만이 있을 것이다.”
풍환이 손짓을 하니 궁수대가 나와 활을 겨누었다.
수성은 지지 않고 강궁을 꺼내 쏘았다. 날아간 화살이 풍환에게로 향했다. 풍환은 혼비백산하여 엎드렸다. 한나라 궁수들이 맞대응하자 고구려 군사들도 성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풍환은 속은 게 분해서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들었다.
“쥐새끼 같은 놈들! 내 당장 나가 저들을 섬멸할 것이다.”
“고구려군을 얕보아서는 안 됩니다. 수가 적어도 일당백(一當百)의 강병이니 조심해야 합니다.”
채풍이 말렸지만 자사 풍환은 막무가내였다.
“그럼 저들이 우리를 얕보는 건 괜찮단 말이냐?”
머쓱해진 요동태수 채풍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풍환은 전군을 총동원하여 고구려군을 들이쳤다. 한동안 맞서 싸우던 수성은 때가 무르익자 슬쩍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악에 받친 풍환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뒤쫓았다.
수성은 한나라 군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매곡을 향해 도망쳤다.
고구려군을 쫓던 풍환이 매곡에 이르자 고구려 군사들이 별안간 돌아서서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갑작스러운 반격에 놀란 한나라 군사들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사이 고구려군은 못 이기는 듯 계곡 안으로 숨어들었다.
풍환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계곡으로 들어갔다. 후위 부대까지 진입했을 때였다. 갑자기 함성이 울리더니 산 위에서 통나무와 바위가 굴러 내려왔다. 미처 피하지 못한 한나라 군사들은 머리가 깨지고 뼈가 부러졌다. 요행히 무사했던 군사들도 뒤이어 쏟아진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함정이란 걸 알아차린 풍환은 계곡을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고구려 군사들이 창칼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통에 몸을 빼낼 수 없었다.
풍환은 급히 달려온 요광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현도태수의 군사가 합세하는 것을 본 고구려군은 공격을 멈추고 물러났다.
혼쭐이 난 풍환은 요광과 함께 예맥성으로 후퇴했다. 이들이 예맥성 인근에 다다랐을 때 채풍이 수하 몇 명과 함께 피범벅이 된 채로 뛰어왔다.
채풍이 풍환을 보더니 풀썩 주저앉아 울음부터 터뜨렸다.
“자사께서 나가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구려군이 성문을 부수고 들이닥쳤습니다. 온 힘을 다해 싸웠지만 남은 군사만으론 그들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채풍의 간언을 듣지 않은 풍환의 탓이었다.
풍환이 속이 상해 묻는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잔뜩 기가 죽은 자사의 물음에 채풍이 눈물을 닦으며 응답했다.
“일단 군사를 물리고 후일을 도모하는 게 좋겠습니다.”
자사도 할 수 없이 요동태수의 말을 따랐다.
요동의 요수현(遼燧縣)으로 물러난 풍환은 군사를 보충하면서 반격을 준비했다.
첩자를 통해 한군의 동향을 보고받은 수성은 장군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의 병력으로는 저들의 공격을 막아 내기 어려울 듯하다. 지난번에는 기습 작전이 통해서 성을 되찾았지만 그런 술책이 계속 먹히지는 않을 것이다.”
수성은 도성으로 전령을 보내 지원군을 요청했다.
태조왕은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서전의 승리로 우리 군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여세를 몰아 진격한다면 어렵지 않게 요동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우태 고복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목도루가 나섰다.
“소신을 보내 주십시오. 한군을 격파하고 요동 땅을 수복하겠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출전을 원하니 왕이 보기에 흐뭇했다.
“이번에는 짐이 직접 출전할 것이오.”
태조왕은 목도루 등의 장수와 함께 선비족 군사 8천을 포함한 정예군을 이끌고 출전했다.
예맥성에 도착한 태조왕은 수성과 상의한 끝에 두 길로 나누어 요수현을 치기로 했다.
고구려군이 양 갈래로 진격해 온다는 첩보를 들은 유주자사 풍환은 채풍과 요광에게 군사를 나누어 막게 했다.
요동태수 채풍의 군대가 신창에 이르렀을 때 태조왕이 이끄는 고구려군과 맞닥뜨렸다.
한나라 선봉장 용단(龍端)이 나서서 외쳤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함부로 밀고 들어오느냐? 오늘 내 검이 피 맛을 보겠구나!”
고구려 진영에서는 목도루가 나섰다.
“네 검이 내 장창을 당해 낼 수 있겠느냐!”
목도루의 장창은 무게가 50근이 넘어 웬만한 장정은 들기도 버거웠다.
육중한 창이 머리 위에서 춤을 추었다. 기세에 눌린 용단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했다. 무기가 서로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었다. 용단은 첫 합에 자신의 상대가 아니란 걸 느꼈다. 수 합을 간신히 막아 낸 용단은 때를 보아 내뺐다. 장수가 달아나자 한나라 군사들도 전의를 잃고 꽁무니를 뺐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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