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60]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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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나와 세자를 떼어놓으려 하니 막아주기 바라오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3-31 09:53:15

1896년 1월 12일, 러시아 신임공사 슈페이예르는 베베르와 함께 고종을 알현하고 신임장을 제출했다. 그는 10여 년 전에 두 차례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다. 지금 국왕은 훨씬 수척하고 약해져 있었다. 일본 관리가 그들과 함께 있었기에 고종은 애타게 기다렸던 슈페이예르 공사에게 정작 하고 싶은 말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아주 관례적인 대화만 나누었다.

슈페이예르 신임공사가 물러가는 길에 고종이 일어나서 복도까지 따라 나왔다. 고종은 배웅하면서 일본 관리가 못 보는 틈을 타서 슈페이예르 공사의 주머니에 작은 쪽지를 재빨리 넣었다. 슈페이예르가 당황했지만 베베르가 눈짓을 주어 모르는 척 받아 넣었다. 이범진이 번역해준 고종의 한문 친필 쪽지의 내용은 이랬다.

“일본인들이 나와 세자를 떼어놓으려고 하니 막아주기 바라오,”

쪽지 내용을 본 슈페이예르가 말했다.

“베베르 공사의 말씀이 옳군요. 국왕께서는 감시당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유롭게 말씀하시질 못했어요. 딱한 일입니다. 그렇게나 다정하고 배려심 많은 분이 왕비를 잃은 것도 모자라 유폐되어 지내시다니요.”

“아까 제가 열쇠를 전해드리지 않았습니까? 식사도 마음대로 못하십니다. 우리들이 음식을 장만해 자물쇠가 달린 통에 담아 드리면 열쇠로 열어서 드신답니다.”

베베르가 설명했다.

“그래서 그리 수척해지셨군요!”

정의감이 뛰어난 슈페이예르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조선의 자율권과 독립을 보장하느니 어쩌고 하면서 국제적으로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으니, 원!”

슈페이예르 공사의 잘 생긴 이마가 찌그러졌다.

“전하께서는 믿을 나라가 러시아밖에 없다고 생각하십니다. 두 분께서 전하의 마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범진이 공손하게 말했다. 다음날에도 고종의 편지가 이범진을 통해 전달되었다. 내용은 비슷했다. ‘러시아의 도움으로 조선이 밝은 미래를 맞기를 희망한다’고 쓰여 있었다. 슈페이예르가 임명 당시 러시아 본국으로부터 받은 훈령은 조선 문제에 직접 개입하지 말고 요동반도와 여순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릴 것과 조선 내 일본인의 활동을 보고하는 일이었다. 며칠 후 슈페이예르는 부임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올렸다.

“왜인들은 동경에서 그들이 조선을 위한 바람직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으나 그들의 말과 행동은 전혀 들어맞지 않습니다. 조선에서 그들의 파렴치한 주인 행세가 어디까지 일지 예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조선을 일본화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린아이처럼 조급하게 서두르고 있습니다. 또 전혀 다른 목적을 감추고 있는 사람처럼 졸렬하게 행동합니다. 작년 10월 8일 왕후 시해 사건 이후 포로가 된 국왕, 피로 물든 모반자들의 권력 장악,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의 내정 간섭, 거리에서 강제로 상투를 잘린 사람들로 혼란스럽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치욕을 민중은 인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저항할 힘이 없습니다. 왜국의 이러한 조치는 이웃나라인 왜국에 대한 조선인들의 뿌리 깊은 증오심을 더욱 심화시킬 것입니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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