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59] 슈페이예르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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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형 연재소설

전하께서 공사님의 입국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3-30 07:52:38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는 중에 고종의 궁궐 탈출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 고종이 별입시 이범진에게 내린 네 글자 ‘성동격서’는 의병장들에게 거의 밀지를 내려 여러 지역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일본과 왜당정부의 시선을 흩어놓아 궁궐과 도성의 수비병력을 분산시킨 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하는 작전이었다.

이천 김하락 의병의 끈질긴 항전은 경성수비대 왜군 중 200명을 이천으로 내려오게 만든 공로가 있고, 춘천에서 거병한 이소응이 방향을 돌려 서울로 진격하는 바람에 궁궐을 수비하던 친일괴뢰군인 친위대 병력은 허술해지게 되었다. 왕의 밀지를 받은 충성스런 열사들의 희생으로 꿈같은 아관망명이 도래하고 있었다.

연말이 되자 웅장한 사각 탑의 러시아 공사관은 분주해졌다. 베베르의 후임 슈페이예르 공사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베베르는 일찍이 멕시코주재공사로 발령받았으나 후임자가 도착할 때까지 대기하라는 러시아 정부의 지시에 따라 조선을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한동안 두 가족이 한 지붕 아래에서 살게 되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베베르 공사 내외가 슈페이예르 신임공사를 반가이 맞이했다. 영하 20도에 가까운 날씨여서 입김이 뽀얗다. 슈페이예르는 아내 안나와 함께였다. 그들은 반가움의 포옹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부인들은 내실로 가고 두 공사는 서둘러 2층에 있는 접견실로 향했다.

“오는 길에 동경에 들러 주일공사인 히트로보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 총리와 사이온지 외상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들은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또한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할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고 조선의 독립을 존중한다고 했습니다.”

슈페이예르가 말문을 열었다. 시원한 이마가 돋보이는 외모다.

“그들이 조선 문제에 있어서 우리 러시아와 협력하여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겠다는 말도 하지 않던가요?”

베베르가 반문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슈페이예르가 놀라서 물었다.

“그들이 전면에 내세운 입장입니다. 왕비를 살해하고도 그렇게 말했지요. 일본은 조선문제에 있어 ‘양두구육’의 정육점입니다. 그들이 내건 것은 양의 머리, 평화이지만 그들이 파는 것은 개의 고기, 침략과 정복이지요.”

베베르가 단호하게 설명했다.

“제가 오는 길에 느낀 것은 조선은 전혀 평화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으로 백성들의 군대로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슈페이예르의 소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