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서 등 번호 ‘10번’은 아무나 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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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마라도나·메시 등 스타들의 전유물
2002월드컵 때 이영표 10번 달고 4강 신화

박병헌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3-29 09:47:19

축구나 야구·농구·배구 등 단체 운동 종목에서는 선수들이 저마다의 배번을 달고 있다. 선수 개개인을 구별하기 위한, 팬들을 위한 일종의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가 유니폼 등 뒤에는 이름도 써 놓는다. 그라운드에서 11명이 쉴새없이 달리고 부딪히는 축구의 경우 나름대로 특징을 갖고 있는 게 배번이다. 그렇지만 배번의 뜻이 절대적인 것은 물론 아니며 예외도 있다.

축구에서 등 번호 ‘10번’은 아주 특별하다. 최고의 선수들이 달아 온 번호이기 때문이다. 등 번호 10번의 선수로는 브라질의 축구 황제 펠레·지코, 프랑스의 미셸 플라티니·지네디 지단과 킬리안 음바페, 아르헨티나의 디에고 마라도나와 리오넬 메시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등 번호는 영어로 저지 넘버(Jersey number), 또는 유니폼 넘버(Uniform number)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도 ‘백 넘버(back number)’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흔한데 이는 일본에서 나온 잘못된 영어식 표현이다. 야구에서 몸에 맞는 볼을 ‘힛 바이 피치트 볼(hit by pitched ball)’이라 하지 않고 ‘데드 볼(dead ball)’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축구에서 번호가 매겨진 유니폼을 처음 입은 것은 1911년 호주 팀인 시드니 레이차트와 HMS 파워풀 간의 경기에서였다고 한다. 축구 종가인 잉글랜드 프로축구에선 1928년 웬스데이와 아스날의 경기에서 양팀 선수들이 처음으로 등 번호를 달았다.

월드컵에선 1950년 브라질 대회 때 등 번호가 처음 도입됐다. 각국 축구 대표팀의 경연장인 월드컵 무대에서 10번은 아무나 달 수 없다. 역대 세계 최고의 스타들이 10번을 달고 뛰었기 때문에 가장 명예롭고 선망을 받는 등 번호다. 축구에서 등 번호는 주로 포지션 위치를 표시하는 용도로 쓰인다. 주전 골키퍼는 1번, 2~6번은 중앙 수비수와 좌우 윙백, 7~8번은 미드필더, 9~11번은 공격수들인데 그중 10번은 팀의 에이스가 맡는 게 보통이다. 등 번호는 선수들의 희망과 코칭 스태프의 조정에 의해 결정된다.

▲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의 에이스이자 주장인 등 번호 10번 리오넬 메시. (로이터=연합뉴스)

등 번호 10번의 전통은 세계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히는 펠레로부터 시작됐다. 지난해 하늘의 별이 된 펠레는 1958년 스웨던 월드컵, 1962년 칠레 월드컵, 1970년 멕시코 월드컵까지 3번의 월드컵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영원한 우승후보 브라질’이라는 별칭도 펠레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또 펠레는 해트트릭 92회, 1경기 4골 31회, 5골 이상 6회 등 '골 넣는 기계'로 불리며 선수 시절 총 1281골을 넣었다. 그는 소속팀인 브라질리그 산투스에서도 늘 10번만을 고집했다. 대표팀에서 10번을 고집한 선수는 펠레 외에도 수두룩하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아트 사커'를 지휘했던 지네딘 지단과 현재 프랑스 대표팀 공격수로 2022 카타르월드컵 득점왕인 킬리안 음바페, 그리고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바지오 등도 늘 10번을 달았다. '축구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도 대표팀에서 10번은 그의 독차지다. 메시는 16년간 몸담았던 소속팀 FC 바르셀로나에서는 10번을 달았지만 2021년 8월 현재의 파리생제르망(PSG)으로 이적한 뒤에는 30번을 달게 됐다. 10번은 PSG에 먼저 입단한 브라질의 네이마르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20년 사망한 아르헨티나의 디에고 마라도나 역시 10번을 달고 그라운드를 누볐다.

한국 월드컵 역사에서도 10번은 주요 선수들의 차지였다.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선 박창선,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이상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고정운,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최용수, 2002년 이영표, 그리고 2006 독일·2010 남아공·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3회 연속 박주영이 10번을 달았다.

2002년 월드컵 때 수비수인 이영표가 10번을 달게 된 것은 오로지 히딩크 감독의 지시 때문이었다. 황선홍·최용수·설기현·차두리 등 공격수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들에게 10번을 줄 경우 자칫 자만심에 빠질까 봐 침착하고 성실한 플레이의 메이커인 수비수 이영표에게 주었다는 뒷 얘기가 전해진다. 공격수들에게 10번을 주지 않은 히딩크 감독의 '신의 한수' 같은 전략이 통했기에 한국 축구는 4강 신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한국 축구의 전설적인 공격수 차범근·최순호·황선홍 등은 10번을 달지 않았다. 카타르 월드컵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의 '에이스' 손흥민도 10번이 아닌 소속팀 토트넘 훗스퍼에서와 똑같은 7번을 달고 뛰었다.

독일 출신의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에서 10번은 독일 분데스리가 FSV 마인츠에서 활약 중인 이재성이 차지했다. 과거 월드컵에 두 차례 출전했던 이재성도 이제 막 출범한 클린스만호에서 에이스다운 활약을 펼쳐 줄 것으로 믿는다. 선수들의 배번에 얽힌 얘기를 알고 축구 경기를 즐기면 그 즐거움은 배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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