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56] 별입시 이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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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범보를 모르는 게로구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3-27 09:55:04

“하하하, 대감이야말로 장군 아니십니까? 젊을 때 대감은 ‘범보’라는 장군 이셨지요? 그건 그렇고, 여인이 장군이라... 나도 궁금해지는군요. 어찌되었건 전하를 위해서는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 그분을 보필할 여인이 필요하니까요.”

베베르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범보요? 그 별명은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공사님은 조선에서 생긴 일은 모르시는 게 없어 문제입니다.”

이범진이 살짝 눈을 흘겼다. 함께 즐겁게 웃는 얼굴에 장난기가 보인다.

이범진은 이경하가 진주병사로 있을 때 그곳 기생과의 사이에 난 서자였다. 아버지 이경하는 포도대장 시절 수많은 죄수들을 잡아 처형해 사람들을 벌벌 떨게 했던 인물로서 ‘낙동염라(낙동에 사는 염라대왕)’로 유명했다. 아들인 이범진 또한 날렵하고 용맹했다. 젊을 때는 범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범보는 ‘범자 이름을 가진 망나니’라는 뜻이다.

서울에는 이름난 장국밥집들이 있었는데 민씨 척족 민영주가 패거리를 몰고 와 돈 한 푼 내지 않고 먹고 가곤 했다. 이 소문을 들은 이범진이 장국밥집에 가서 민영주의 행패를 보고 엄하게 꾸짖었는데 민영주가 듣지 않으니, ‘네가 범보를 모르는 게로구나!’ 소리치며 아궁이에서 불타는 장작을 꺼내 민영주를 후려쳤다. 민영주가 울고불고 빌면서 애걸하자 살려 보냈는데 그뒤로 민영주는 다시는 장국밥집에 오지 못했다. 세도가 여흥 민씨를 혼쭐내는 그런 기백이 있는 이범진이었다.

이범진은 26세 때 병과에 급제했다. 서자에게도 과거길이 열린 덕분이었다. 그는 갑신정변 날 당직이었다가 위험에 빠진 왕비를 업고 노원으로 피신하여 왕과 왕비의 신임을 얻었다. 삼국간섭 이후에는 고종의 특명으로 궁내부 협판에 발탁되는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고종을 탈출시키려 한 춘생문 사건이 실패한 후 왜당 정부의 눈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숨어들었다. 눈에 띄면 목숨이 위태롭기에 상하이로 망명한 것으로 해두었다. 부인과 연락할 때에도 신중하였고 가족들도 그가 국내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다음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별입시 이범진은 서둘러 춘천으로 향했다. 그의 품에는 고종의 밀서가 안겨 있었다. 어제밤 그는 궐에서 가마를 타고 나온 엄 상궁을 만났다. 엄 상궁은 조심스레 고종의 밀지를 전달했다.

“마마님, 고맙습니다. 소신이 전하의 뜻을 받들겠노라 꼭 전해 주십시오.”

이범진은 엄 상궁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직접 궐에 들어갈 수 없는 그에게 엄 상궁은 좋은 심부름꾼이 되어 주었다. 춘천으로 가는 길 위에서 그는 품 안의 밀지를 확인했다. 바스락 소리가 났다. 고종의 편지는 두 장이었다. 하나는 춘천 의병장 앞으로 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범진 자신에게 내리는 것이다. 자신의 편지에는 딱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성동격서(聲東擊西)’

동쪽에서 소리 지르고 서쪽을 친다는 뜻으로, 동쪽을 쳐들어가는 척 하여 상대를 교란시키고는 서쪽을 공격하는, 상대방을 속이는 전술을 뜻한다. 전국 곳곳의 의병장들에게 거병하게 하여 도성과 궁궐의 병력을 줄이려는 국왕의 계책이다. 이범진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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