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55] 보모 손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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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입시 이범진이 베베르의 거실을 찾아왔다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3-24 09:20:08

손탁은 유제니 오빠의 처형이었다. 유제니와는 사돈지간이다. 그녀는 유제니와 돈독한 사이였다. 결혼하지 않은 손탁은 유제니의 둘째아들인 오이겐의 보모로서 베베르 가족과 함께 생활했다.

“처형 말씀이 옳아요. 나라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외교관의 임무이지요. 그런데 요즘 큰일을 앞두고 있는데...”

베베르가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여보, 큰일이라니요? 궁궐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유제니가 파고들었다. 유제니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았다. 교양 있고 사려 깊은 유제니는 보는 사람마다 칭찬하는 현명한 여성이었다. 그래서 베베르도 모든 일을 아내와 상의했다. 유제니는 외교적 성향을 타고 났고 친절함이 몸에 밴 여성이었다.

“이 얘기를 해도 좋은지 모르겠소. 국왕께서 궐을 나와 이곳에 피신하고 싶어 하신다오.”

“어머나! 여보, 그게 사실이에요?”

유제니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잘 생긴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평소 침착한 그녀가 너무 놀라는 바람에 베베르가 당황할 지경이었다.

“유제니, 지난번 춘생문 일 이후로 국왕께선 더욱 더 힘든 나날을 보내고 계시니 그럴 만도 하지요.”

손탁이 대신 대답했다. 나이 예순이 다 되어가는 그녀는 유제니 못지않게 지혜롭고 현실감각이 있는 여성이었다. 손탁은 유제니를 도와 국왕의 음식을 만들어 보내곤 했다.

“후임인 슈페이예르가 들어오면 함께 의논할 일이지만 이 일은 내 권한 밖의 일 아니겠소? 황제의 재가가 있어야 하는 일이고...”

베베르는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심각해질 때 그는 안경을 벗는 습관이 있었다.

“지난번엔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시려 했는데 실패했지요? 본국에서 허락해주면 이곳으로 오시면 좋겠습니다.”

손탁이 말했다.

“후임 공사가 이 일을 잘 맡아주면 좋을 텐데요.”

유제니가 동의했다. 힘든 일이긴 했지만 지금 조선의 상황과 국왕의 처지를 생각하면 달리 더 좋은 방도가 없어 보였다. 남편 베베르가 국왕과 사이가 좋았으므로 유제니도 시해된 왕비와 막역했다. 왕비가 살해됐다는 말을 듣고 며칠간 눈물로 밤을 지샜다. 일이 성사만 된다면 국왕은 다리 뻗고 편안히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식사도 마음껏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제니는 자신이 조선을 떠난 후에도 국왕이 잘 지내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그것은 손탁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또한 국왕과 친밀했다. 베베르는 두 여인에게 비밀을 지킬 것을 각별히 부탁했다.

며칠 후 어스름한 저녁, 고종의 별입시 이범진이 베베르의 거실을 찾아왔다. 큰 키는 아니지만 날렵하고 탄탄한 몸매에 미남형의 얼굴이었다.

“이 대감, 전하에게서 소식이 있나요?”

베베르가 물었다. 이범진은 춘생문 사건 이후로 공사관에 피신한 고종의 수족 같은 인물로서, 거의 매일 궁궐로부터 국왕의 메모나 밀지를 전달하는 충신이었다.

“예, 공사님! 오늘은 좋은 소식입니다. 전하의 승은을 받고 나서 궐 밖으로 쫓겨났던 궁인이 있습니다. 왕비가 살아계실 때 일이지요. 전하께서 그 여인을 불러들이셨습니다.”

“그래요! 그 궁인에 대한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만, 어떤 여인입니까?”

“진중하고 든든한 여인입니다. 마치 장군 같은 외모입니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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