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54] 유제니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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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라니? 당신은 동아시아 전문가에요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3-23 08:13:55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혹독한 서울의 겨울 속에서도 아주 따뜻한 곳이 있었다. 바로 러시아 공사관이다. 러시아 공사관은 흰색 벽과 사각 탑이 멋드러져 교회처럼 생긴 건물이다. 서울의 북쪽 언덕, 정동의 가장 높은 곳에 있어서 서울을 한 눈에 내려다본다. 1895년 12월의 어느 날,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난방이 잘된 훈훈한 거실에서 부인과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거실 중앙에는 고종이 하사한 호랑이 가죽이 누워 있다. 날카로운 이빨과 빛나는 눈을 가진 호랑이는 겨울 햇살의 정기를 받아 언제라도 튀어나갈 것 같다. 그 옆으로는 부인 유제니와 차남 오이겐이 즐겨 연주하는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다.

“이제 조선생활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소.”

베베르가 신문을 펼치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부인 유제니가 물었다.

“본국에서 나를 멕시코공사로 발령했다오.”

베베르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국왕께서 니콜라이 2세 대제께 편지를 보내지 않았어요? 당신이 조선에 더 머물기를 바란다고 간곡하게 말씀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유제니가 반문했다. 믿기지 않는 표정이다.

“본국에선 나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조선정국에 깊이 관여하는 것을 싫어하는 세력도 있다오. 내가 국왕부부와 너무 가깝게 지낸다고 주의를 주기도 했구요. 정든 조선을 이제 떠나야 하나?”

베베르가 조선에 와서 국왕부부의 신임을 듬뿍 받은 것은 사실이다. 발트 독일인인 베베르는 약한 민족의 설움을 잘 알고 있었고 동정심과 감수성이 예민한 신사였다. 그는 조선의 처지를 실감했고 진심으로 국왕을 아껴주었다. 베베르의 그러한 마음이 통하여 국왕은 어느 누구보다 그를 가장 믿었다.

“일본과 중국에서도 지냈지만 조선만큼 좋은 곳은 없어요. 이 나라 사람들은 예의바르고 착하지요. 멕시코라니? 당신은 동아시아 전문가예요. 그런 당신에게 멕시코는 가당치 않아요.”

유제니가 커피를 마시며 항변했다.

남편은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 동양어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전문가다. 그들은 요코하마와 텐진에서 10년간의 외교관 생활을 거쳐 1885년 9월에 조선에 들어왔다. 부임하자마자 베베르가족은 조선에 체류하고 있던 선교사·외교관들을 관저로 초대하여 후대했다. 부인 유제니의 헌신적인 내조가 컸다. 가족 없이 혼자 들어온 외로운 외국인들을 위해 베베르의 거실은 음악회장이 되기도 무도회장이 되기도 하였다.

베베르는 조선에서 외교협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동안 조선은 격랑 속에 휘둘렸다. 가장 큰 사건은 왕비시해사건이었다. 그때도 외국인의 중심에는 베베르가 있었다. 가장 먼저 국왕을 찾아가 위로했고 선교사와 외교관들을 이끌고 일본 공사를 만나 사건을 따지고 규명한 것도 베베르였다. 유제니의 머릿속에 지난 세월이 스쳤다.

마침 손탁이 곁에 와서 앉았다.

“손탁 언니, 언니 생각은 어때요?”

유제니가 손탁의 의견을 구했다.

“유제니, 물론 나도 조선을 사랑해요. 하지만 본국 정부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공사님의 일이지요. 멕시코라면 멕시코, 아프리카라면 아프리카!”

손탁은 막 구운 과자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코코아향이 솔솔 풍겼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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