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51] 연못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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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준은 말벗이고 믿을 수 있는 심부름꾼이었다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3-20 08:12:31

이런 고종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김홍집과 유길준이었다.

“참으로 한가하십니다. 어린 나인 데리고 겨울놀이나 즐기시구요.”

유길준이 한 마디 했다.

“전하께서 마음 쓰실 일이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정치야 일본과 우리가 맡아서 잘하고 있는데요.”

김홍집이 비꼬았다.

“진즉에 이리 편하게 지내실 것을, 왜 그리 노심초사하며 지내셨는지, 원...”

“이게 다 왕비가 떠난 후에 누리시는 휴가 아닙니까? 곁에 붙어서 장군 멍군 하는 부인 비위 맞추느라 전하께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들은 한가한 고종의 모습에 흐뭇해하며 제 갈길로 갔다. 그 사이 명준은 몇 번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강 내관과 고종이 번갈아가며 손을 잡아주고 일으켜주어 드디어 명준은 자기 힘으로 똑바로 서게 되고 조금씩 얼음을 지칠 수 있게 되었다.

“전하, 보십시오! 제가 이제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작은 명준은 치렁거리는 치맛자락을 양 손으로 잡고 제법 잘 하고 있었다. 어느새 강 내관도 재미가 났다. 명준의 붉은 스케이트는 연못 안쪽에서 바깥으로 가장자리에서 안쪽으로 현란하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 명준을 바라보며 고종은 자신에게도 저런 딸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앗! 하는 사이에 명준의 왼쪽 발밑에서 얼음이 꺼졌다. 명준이 허우적대다가 왼쪽 발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전하!~~~” 하는 외마디 외침에 고종은 명준 쪽으로 내달렸다. 동시에 강 내관도 달려갔다. 스케이트를 신은 채 두 발이 물속으로 들어간 명준은 양손으로 얼음을 잡고 겨우 버티고 있었다. 강 내관이 명준에게 도착했을 때는 이미 차가운 얼음 물 속에 가슴까지 잠겨있었다. 고종의 호령에 내관과 나인들은 명준을 구하러 이리 뛰고 의관을 부르러 저리 뛰고 향원정 연못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혼절한 명준은 강 내관의 등에 업혀 가까운 처소로 옮겨졌다.

고종은 자신의 처사가 얼마나 경솔했는지 후회했다. 명준은 고종에게 예사로운 나인이 아니었다. 겨우 5살 때 지밀나인으로 궐에 들어 온 명준은 왕비의 사가에서 기르던 아이였다. 왕비를 가까이 모시던 몸종이 국혼 때 따라 들어왔는데 몸이 약한 아이라 다시 친정에 돌려보냈다. 그 아이가 건강을 회복하고 결혼하여 낳은 아이가 명준이다. 그런데 명준의 어미가 돌림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떴기 때문에 왕비가 어린 아이를 거두어 궐로 들어오게 하였다. 그렇게 명준은 대를 이어 왕비의 곁에 있게 되었고 왕비 또한 이 아이를 조카처럼 아꼈다. 게다가 생김새며 총명함이 신기하게도 죽은 왕비를 빼어 닮았다. 왕비와의 사별 후에 고종에게 가장 기쁨과 위안을 주는 아이가 바로 명준이었다. 어린 것이 눈치도 빠르고 기억력도 좋았다. 특히 한 번 본 사람은 인상착의와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고종에게 명준은 말벗이고 믿을 수 있는 심부름꾼이었다.

고종은 오 분이 멀다하고 강 내관을 불렀다. 명준은 겨우 의식은 회복했지만 열이 높았다. 의관이 침을 놓으며 돌보는 중이라고 전했다. 고종은 당장 달려가고 싶은 것을 참고 강 내관에게 특별한 분부를 반복했다. 밤이 어두워졌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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