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44] 신성한 망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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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하다가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일세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3-09 09:54:43

호롱불 빛에 고 선생의 눈빛이 일렁였다. 창수의 마음 속 울분과 열망이 그 눈 속에 있었다.

“스승님, 그러면 조선은 어찌해야 살아납니까?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창수는 자기도 모르게 고 선생의 손을 꼭 쥐었다.

“창수군, 안 진사가 왜 여기 청계동으로 온지 아는가?　그는 개화파와 친했다네. 갑신년 정변이 실패하자 가문에 화가 미칠까 두려워 이곳에 피신한 거라네, 그런데 개화를 꿈꾸는 자들이 순전히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것일까? 갑신년 정변 때 그들은 전하를 협박하고 무도한 반역을 꾀했네. 전하는 백성의 아버지이신데 그 분을 겁박했다는 것은 이 나라를 저버린 것과 같지 않은가? 저들은 서양의 언어와 문명을 익혀 자신들의 영화를 추구할 뿐이지. 마치 양혜왕이 ‘이로움’을 원한 것처럼 말이야.”

“지금 조정은 친미파와 친러파와 친일파 들이 싸우고 있는 것 아닙니까?”

“자신의 영달을 위해 분투하는 신하들이 언젠가는 가장 강한 쪽에다 나라를 들어 바치겠지.”

고 선생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쩍했다. 예리한 칼날에 마음이 베어질 것 같았다.

“그것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창수는 자신도 모르게 고함쳤다. 고 선생의 눈빛에 베어져 나오는 핏빛 외침이었다.

“내 말을 명심해야 하네. 기본은 사랑과 정의라네. 나라가 망하는 데도 신성하게 망하는 길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길이 있다네. 백성들이 의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음으로 망하면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지만, 백성과 신하가 모두 적에게 아부하다가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일세. 지금 왜놈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의 힘이 대궐에까지 파고들어 충성하는 신하들을 마음대로 내치고 나랏님을 가두고 협박하니 이는 나라를 제2의 왜국으로 만들고 있는 것 아닌가?”

고 선생의 음성은 고요한 방 안을 가르는 장검이 되어 창수의 가슴을 찔렀다.

“스승님, 그러면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베여 피가 흐르는 심장을 부여잡고 창수가 외마디 탄식을 냈다.

“망해도 신성하게 망해야지 않겠나. 인과 의를 세워 나라님과 백성이 힘을 합해야지. 자네나 나나 죽음으로 나라님과 백성을 지키고 충성하는 길만 남았네, 신성하게 망하면 후일을 기약할 수 있을 걸세, 그것이 세상의 이치고 나라의 기본이니까.”

선생은 처연하게 창수를 바라보았다. 허공을 가르던 칼끝은 칼집에 들어갔다. 창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선생님, 그래도 망하지 않게 하는 방법은 없습니까?”

“자네 말이 맞네, 나야 이제 살날이 얼마 안 남았지만 자네 같은 젊은이와 내 손녀 같은 아이들은 어찌하겠나? 나는 그래도 서양을 따르지 말고 청나라와 힘을 합하는 게 좋다고 보네. 청나라가 일본에 한 번 졌지만 다시 일어날 걸세. 자네 한 번 청나라에 가보지 않겠는가?”

“그것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방책이라면 가보겠습니다.”

창수는 머뭇거리지 않고 답했다.

“내가 안 진사 집에서 만난 참빗장수가 있다네. 자네와 같은 안동 김씨인데, 아주 똑똑하진 않지만 함께 길 떠나기엔 괜찮은 사람이지. 자네에게 도움이 될 걸세.”

“그러겠습니다. 스승님!”

창수는 고 선생과 헤어져 집으로 향했다. 공자와 맹자의 땅 중국 대륙으로 향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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