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42] 고산림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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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선현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좋겠네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3-07 10:33:56

“선생님, 제 인생은 너무도 막막합니다.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나 양반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살았습니다. 동학도를 알게 되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 볼까하여 나서 보았지만 패전하여 아끼던 부하들을 모두 잃고, 동학도를 토벌하는 안 진사댁에 숨어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습니다. 공자님은 ‘열다섯 살 이면 학문에 뜻을 세워야 한다’고 하셨는데 저는 스무 살이 되도록 실패만 하고 만신창이입니다.”

의기소침한 동학 아기접주 창수가 해주 신천동의 숨은 현자인 고능선 선생에게 하소연하고 있었다. 고능선은 50세 남짓한 유자로 유학 경전에 두루 통한 사람이었다. 안 진사의 소문을 듣고 자주 그 집을 다니며 나라를 구할 뜻을 도모하고자 교유하고 있었다. 안 진사 사랑방에서 젊은 창수를 만난 그는 한눈에 창수가 재목임을 알아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고능선 선생은 이 동네에서 ‘고산림’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했다. 산림에 거하는 지혜로운 은자라는 뜻이리라.

“무슨 소리인가? 자네는 큰일을 할 수 있다네. 안 진사가 동학 접주인 자네를 왜 숨겨주고 있겠나? 그건 다 자네의 인물됨을 아끼기 때문이라네.”

고능선은 작은 몸집에 깔끔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작고 날카로운 눈과 곧은 코, 단정한 입매를 가진 사람이었다.

“선생님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분이 아닙니까? 제가 갈 길을 알려주십시오. 지금이라도 방도를 찾아 나라를 구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고 말고, 자네는 할 수 있다네, 창수군, 내 하나 물음세. 조선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고능선의 이 말에 창수가 얼떨떨하고 있을 때, 사랑방 문이 열리더니 선생의 큰 며느리가 들어왔다. 다과상을 가지고 온 것이다. 며느리는 조용히 상을 내려놓고 창수를 향해 미소를 짓고는 물러갔다. 따뜻한 환영이 담긴 미소다. 창수는 ‘역시 선생님 댁 며느님답구나’ 라고 생각했다.

“떠오르는 생각이 없나?”

고 선생의 물음이 다시 날아왔다. 창수는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선생님, 서양의 많은 나라가 조선을 탐내고 있고 조정의 신하들은 어디에 붙어야 권세를 누릴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지금은 일본이 가장 힘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왕비께서 러시아와 가까워지시니 왕비를 무참하게 살해하였구요.”

창수가 답했다.

“그렇지, 바로 보았어. 그렇담 일본에게 먹히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나?”

“오랜 친구인 청나라가 있지만 이미 일본에게 지고 말았습니다. 서양인들은 믿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매일 속만 답답합니다. 선생님!”

창수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제가 어찌해야 할지 알려주십시오, 선생님.”

창수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절박한 심정이었다.

“우선 자네는 선현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좋겠네. 그러다 보면 앞으로 할 일도 알게 될 걸세. 어떤가, 오늘 처음 왔지만 이제부터 내 집에 와서 매일 공부하지 않겠나?”

고 선생이 양팔을 벌리고 말했다. 학이 양날개를 편 듯 했다. 창수는 자신보다 왜소한 선생님의 품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 품 안에 모든 해답이 있을 것 같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