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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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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짜리 짧은 영상도 길다고 건너뛰면서 보는 시대, 조금의 더딤도 못 견디는 조급한 시대가 되었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느리게 살피고 천천히 넘기는 그림책을 비롯해 문학의 숲을 거니는 즐거움을 저 혼자만 알고 있기엔 너무 아깝죠.”
김여진 그림책 번역가는 좋아하는 구절에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고 가장 아름다웠던 그림책 장면을 서로 이야기하는 우아한 시간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2021년부터 지금까지 해외에서 호평받은 34권의 그림책을 우리말로 옮기며 이런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중이다.
“피터 레이놀즈의 ‘나는 나예요’는 제가 번역한 그림책 중 가장 최근에 출간된 작품이에요. 글은 수전 베르데 작가가, 그림은 피터 레이놀즈 작가가 맡아 두 작가의 콜라보가 시리즈로 출간되고 있어요. 일명 ‘I am’ 시리즈고요. 현재 ‘I am Love’ ‘I am Peace’ ‘I am One’ ‘I am Human’ ‘I am Courage’ ‘I am Yoga’ ‘I am Me’가 현지에서 출간되어 있어요.”
“국내에는 ‘나는 ( ) 사람이에요’ (‘I am Human’, 위즈덤하우스, 2021) ‘나는 나예요’ (‘I am Me’, 위즈덤하우스, 2023) 의 2권이 나온 상태예요. 시리즈로 함께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세상에 둘도 없는 나, 고유한 나, 그러면서도 타인과 공존하는 나를 그린 아름다운 그림책이죠.”
그림책 덕후 초등 선생님
김 번역가는 앳된 모습과는 달리 본업은 18년 차 초등교사다. 서울 은평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영어 전담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체육부장이라는 중책도 겸하고 있다. “가르치는 과목은 영어인데요. 학교 보직 업무로 보건 건강‧체육 운동회‧비만 어린이 관리 프로그램 등도 함께 담당하고 있어요.”
그는 지난해 12월, ‘피땀눈물, 초등교사’라는 에세이 책도 출간했다. 책을 쓸 때 글감을 아이폰 메모장에 간단히 적어 두고, 영감이 오면 홀린 듯이 글을 쓴다고 한다. 한번 시작하면 빠른 속도로 초고를 완성한다고.
“제 18년 교직 경력의 가장 아프고‧아리고‧슬프고‧흥겹고‧행복했던 순간만 쏙쏙 골라 적은 책이에요.”
대구가 고향인 김 번역가는 어린 시절 책을 좋아해 작가가 되고 싶은 꿈을 어렴풋이 갖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부모님이 안정적인 직업인 교사직을 갖기를 바래 교대에 들어갔다고 한다. “사실 교직에 뜨거운 사명감이 있어서 교대를 선택한 건 아니었어요. 부모님이 안정적인 직장을 간절히 원하셔서 떠밀리듯 교대에 입학했죠.”
고3 시절, 치열한 입시 경쟁에서 누구나 그렇듯 막막하고 숨 막히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잠시나마 보고 싶은 책을 보며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말했다.
“자정까지 매일매일 있는 야간 자율학습 시간, 참고서를 탁 덮어 버리고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었던 기억이 나요. 특별히 청소년을 위한 책이 아니었음에도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좋았죠.”
대학 시절엔 캠퍼스가 좁은 대구교대가 답답해 집 근처의 경북대 캠퍼스를 많이 누비고 다니며 친구들과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대구 시내인 동성로와 중앙로에서 좋은 친구들과 청춘의 좋은 순간들을 많이 나눴죠. 뮤지션들이 대구에 오면 그런 말을 많이들 해요. ‘다들 미쳤어요? 왜 이렇게 분위기가 뜨거운 거죠?’ 대구 사람들 특징이 열정이 넘치는 점인데 저도 그런 편이죠.”
“약간은 지적으로 성숙한 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대구교대에서 2개의 독서 모임에 속해 있었죠. ‘나목’과 ‘사피엔스’였는데 학교 규모는 작았지만, 진실되고 순수하고 매력적인 친구들과 교류하는 그 순간이 소중했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한 초등학교의 교사로 임용된 그는 책을 마음대로 구매할 수 있는 성인이 됐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고 했다.
“책에 대한 갈증은 어린 시절부터 있었어요. 넉넉한 형편이 아니어서 책을 많이 사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는데, 책을 마음대로 구매할 수 있는 성인이 되자 물 만난 물고기마냥 기뻤죠. 대구에서 ‘낭독 모임’, 영어 소설을 읽는 ‘원서 읽기 모임’, 친구들과 함께 ‘심리학 스터디’ 모임 등 많은 독서활동에 참여했어요.”
“지금은 운영하지 않지만 페북에서 ‘책 100권 읽기 project’ 그룹도 이끌었죠. 성인도서에서 그 관심이 그림책으로 옮겨 가면서 주로 그림책이었지만 많을 땐 1년에 1000권을 구매한 적도 있어요.”
제 2의 커리어 그림책 번역가
30대 초반이었던 2014년, 그는 다양한 문화적 체험을 하기 위해 근무지를 서울로 옮기는 큰 결단을 한다. 교직에는 파견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원래 지역에 소속을 둔 채 1:1 트레이드 방식으로 다른 지역에 2년간 옮겨 근무할 수 있는데 운 좋게 파견을 신청한 바로 그해, 서울로 파견이 결정됐다고 한다. 그후 서울에서의 교직 생활이 만족스러워 소속 변경을 위해 임용고시도 다시 치렀다고 말했다.
“클래식‧록‧재즈 공연‧책‧전시‧영화 등 공격적일 정도로 다양한 문화를 섭렵해 왔어요. 대구에서도 무척 적극적으로 활동했지만, 훨씬 다양한 문화적 경험이 가능한 서울로 가보고 싶다는 게 파견을 결심한 이유였죠. 교육적인 동기에서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지평을 넓혀 보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문화생활 많이 해 봐야지, 다양한 사람을 만나 봐야지, 이게 전부였어요. 그리고 실제 옮겨 보니 여러모로 서울 생활이 만족스러웠어요. 임용 시험을 새로 봐야겠다고 결심했죠.”
거침없이 달려온 김 번역가에게도 30대 중반 교직 생활의 슬럼프가 찾아온다. 그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과 책을 출간하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그 위기를 돌파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제2 커리어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신촌역 근처의 한 문화센터에서 전문 번역가가 지도하는 ‘어린이책 번역 학교’ 3개월 코스를 수강하며 기회를 엿봤지만 검증 안 된 신출내기 번역가에게 일감을 주는 곳은 없었다.
“그림책부터 동화‧그래픽 노블까지 번역 과제가 있었고, 번역 기획서까지 써 보는 체계적인 과정이었어요. 하지만 그게 바로 일감으로 연결되진 않더라고요. 그림책 번역은 쉬운 텍스트를 어떻게 시적으로, 또 의미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게 옮기는지가 관건이에요. 영어 실력은 물론이고 우리말에도 감각이 있어야 하죠.”
녹록지 않은 현실의 벽 앞에서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주도적으로 한다는 마음으로 매일 1시간 일찍 출근해, 동화책이나 그림책 리뷰를 페이스북에 올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이 자신의 남다른 열정을 조금씩 알아봐 줬다고 말했다.
“교직을 그만둘 뻔한 해가 있었어요. 사직할 땐 하더라도 다시 한 번 교실에서 반짝여 보고 그만두자는 생각이었죠. 매일 1시간 일찍 출근해 동화책이나 그림책 리뷰를 페이스북에 올리기 시작했어요. A4 한 장 반이 넘는 분량이었으니 매우 진지했죠.”
“특별한 목적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는데 점점 권수가 많아지니 저도 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50권을 넘어가고, 70‧80권을 넘기니 더 의욕이 생겨서 100권을 채우게 됐죠. 그때 많은 사람이 ‘저 사람은 어린이 책에 미친 선생님이다!’ 하고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는 현재 그림책 번역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지만 앞으로는 동화책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청소년 단편 소설을 곧 출간할 예정이에요. 앞으로는 동화 작가로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어요. 교실에 몸담으며 어린이 책을 깊이 사랑하고, 거기에서 나아가 아동·청소년 문학을 창작하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어요.”
끝으로 영어 학습에 이상적인 교실의 모습과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아이들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지도하는 게 효과적이었는지 물었다.
“숨 막히고 융통성 없는 교실 분위기를 싫어해요. 저 스스로가 음악·공연·영화·문학 등 다양한 문화적 경험 속에서 자라왔고, 아이들이 그런 자유롭고 개방된 모습에서 편안함을 느꼈으면 하죠. 딱딱한 영어 교과서를 영어 그림책에 연계해서 수업을 해요. ‘선생님, 저 영알못이에요!’ 하고 완강하게 영어에 거리를 두려고 하는 학생들에게 수준에 맞는 영어 그림책을 완독하는 경험을 제공하면 정말 기뻐해요. ‘와, 생각보다 쉽네요! 이런 그림책 또 있어요?’ 하고 그림책 추천을 부탁받을 때 가장 행복하죠.”
“글쓰기를 가르칠 때는 먼저 진솔한 저의 글을 읽어 줘요. 특별히 잘나거나 근사하지 않아도 자기 모습 그대로를 드러낸 글이 사람의 마음을 끌거든요. 그리고 또래의 초등학생이 쓴 글을 재미있게 읽어 주면 아이들은 ‘저도 저렇게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하고 용기를 내죠. 아이들이 글쓰기에 몰두해 종이에 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교실, 생각만 해도 정말 짜릿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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